*드림 글 전력

*주제: 자존심

*다이아몬드 에이스 나루미야 메이 드림

*오리주 등장




내 청춘의 소꿉친구는 어딘가 잘못 됐다




내 소꿉친구는 자존심이 세다.


그냥 센 게 아니라 엄청나게 세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세다. 심지어 제일 잘하는 야구랑 관련되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세진다.


나루미야 메이-자존심=0 이라고나 할까,나루미야 메이-자존심=시체라고나 할까. 어느쪽이건 성가시다. 그 높디 높은 자존심에 제멋대로 왕자님 성격까지 더해 늘 독박을 쓰고 앉아있는 건 어릴 때부터 그 녀석과 붙어다니던 나였으니까. 


이건 전적으로 뒤늦게 얻은 막내를 매일 둥기둥기 잘한다 잘한다 하고 키워준 아주머니랑 언니들 탓이라고 보는데 이 자리에는 세 분 다 계시지 않으니 굳이 더 이야기하진 않겠다.


그리고 최근, 그 드높은 자존심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코시엔 마운드에서 메이의 폭투로 결국 팀이 지고 말았기 때문에.


선배들은 전부 메이 탓이 아니라고 말해줬지만, 아마 그 말이 더 메이의 자존심을 아프게 할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라고 메이의 속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짐작일 뿐이다.


그저 '짐작'일 뿐인 건 메이가 연습에 나오지 않은 것도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내 메일이며 전화에도 일절 응답하지 않은 것도, 오늘로 열흘 째에 접어들기 때문이다.


메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을 때 방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받아쓰기에서 내가 메이의 점수 두 배를 받았을 때도 메이는 세 시간 정도 방에 박혀서 불러도 불러도 한 번도 나오지 않았었고, 중학교 2학년 때 내기에서 나한테 졌을 때는 거의 하루 내내 방에서 안 나왔었으니까. 그렇게 혼자 추스르고 나서는 기어 나와서 사람 속을 박박 긁는 게 일상이었다.


"메이 녀석 오늘도 안 나왔어?"

"설마 정말로 야구부 그만 둘 생각인 건 아니겠지."

"진짜 누구 아는 거 없어?"


새 팀의 에이스가 새 팀 시동 후 열흘 째 두문불출인 건 야구부의 누구에게든 걱정되는 일이라 며칠 동안 어딜 가든 메이 얘기밖에 없었다. 메이에게 제안 받아서 같이 이나시로에 진학하게 된 몇 사람인가는 가서 말이라도 걸어보라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 듯했다.


메이 녀석 민폐도 참.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래저래 신경 쓰는 선배들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메이 녀석 내 메일이며 전화에도 전혀 답변 안 하고. 살아있냐고 물으면 ㅇ 한 글자 정돈 써서 보내줘도 되지 않아? 나쁜 놈. 개나쁜 놈.


"매니저, 넌 뭐 아는 거 없어?"

"저요?"


그러니까 나한테까지 질문의 화살이 날아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열흘이나 지나서 물어봤다는 게 오히려 좀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나시로에 입학해서 야구부 선배들이랑 처음 한 대화가 메이 두문불출에 관한 얘기인 건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 메이 녀석이랑 소꿉친구라며. 집까지 옮겨서 따라왔을 정도면 뭐 알고 있지 않겠냐고 그러던데."

"…."


그렇게 말하니 대단한 사이 같지만 그냥 근처에 사는 오빠(15살 차이) 집에 얹혀 살게 되었을 뿐인데. 물론 그 부분에 대해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아무튼, 뭐 아는 거 없어?"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요…."


열흘이나 간 건 나에게도 이번이 처음이라 뭐라 더 할 말은 없었다.


"…전에도 하루 정도 두문불출했던 적은 있지만…이렇게 오래 가는 건 저도 처음이라."

"하루 정도?"

"내기에서 저한테 져서 한 번 그랬어요."

"그땐 어떻게 나왔는데?"

"그때는…길 잃어버렸다고 전화했더니 데리러 나와줘서…."


때는 1월이었고, 나는 메이의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버스를 잘못 탔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연락이 되지 않았고, 친구라곤 메이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메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걷는 바람에 다리는 아팠고 동네는 온통 모르는 것들 투성이였기 때문에 조금쯤 울먹거렸던 것 같다. 메이는 장소 설명을 듣더니 거기 가만히 있어! 하고 소리 지른 후에 데리러 와줬다. 약간 꼬질꼬질하긴 했지만 그 날의 메이는 구세주 같았다고 생각한다.


'야!!! 길눈도 어두운 게 어딜 혼자 싸돌아다니는데!!!'


짜증내는 건 얄미웠지만.


몸집에 비하면 한참 큰 메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는 그날 따라 메이가 유난히 듬직해보였던 것 같다.


물론 그 날 이후로 며칠 내내 울보라고 놀렸던 건 하나도 안 듬직했다.


"이번에는?"

"네?"


잠깐 감상에 빠져있던 걸 다시 끌어올린 건 3학년 선배의 목소리였다.


"전화 해봤어?"

"아…. 네."

"했는데 뭐래?"

"…저기, 전화도 안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목소리가 조금쯤 떨린다고 자각했을 때는 이미 눈앞이 흐릿해져 있었다.


어라. 나 우나?


"헉, 잠깐만! 울어? 얘 우는데?!"

"얘기 좀 들어보랬더니 애는 왜 울리냐!!"


주변이 시끄럽다고 느끼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으려니 불쑥 눈앞으로 수건이 내밀어졌다. 무뚝뚝한 얼굴의 하라다 선배였다.


"써라."

"아, 감사합니다."


수건으로 얼른 눈가를 훔치고 있으려니 어깨 위로 툭 커다란 손이 올려졌다.


"미안하다."

"네?"

"제일 걱정하고 있는 건 너일텐데 추궁하는 것 같이 말하게 되어서."

"아니, 괜찮…."


대답하던 와중에 또 울음이 왈칵 나와서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메이는, 나오면 혼내주기라도 할 테니까."

"…네…두 대만 때려주세요."

"그걸로 되겠어?"

"그 이상은 아주머니한테 죄송하니까…."


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웅얼 대답했다. 하라다 선배는 더 말하는 대신 내 어깨 위의 손을 한 번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라운드에서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고 난 후, 선수와 매니저 선배들의 배려로 평소보다 한 발 빨리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도 오빠랑 새언니는 집에 없어서 느긋하게 얼린 숟가락을 눈에 얹은 채 붓기가 빠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휴."


내일 연습은 쪽팔려서 또 어떻게 가냐. 어릴 때 메이는 그래도 한 명이었지 부원들 한두 명도 아닌데 그 앞에서 울었어…미친 거 아니야….


"끄으으으."


한참 허공에 발차기를 하고 나서 기숙사가 있을 방향을 한참 노려보았다.


이것도 다 나루미야 메이 탓이잖아. 인생에 도움 되는 것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자존심만 쎈 놈이. 메일에 대답 한 통만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그것만 했어도 안 울 수 있었는데.


아직도 잠잠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이 참에 메이 메일이랑 번호 다 삭제해버릴까.


-♪


잠깐 진지한 유혹을 느낀 찰나 핸드폰이 울었다. 메일이다. 어차피 스팸이겠지만. 화면을 열어서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웬수]


메이의 메일 주소를 발견하고 손가락이 멈췄다.


"어?"


내 안의 신속의 임펄스가 깨어났는지 엄청난 속도로 메일 제목을 눌렀다.


내용은 생각보다 휑했다.


[울보]


…아니 이 자식이? 지금 열흘 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처음 보낸 메일이 이따위야? 짜증을 내면서 답장을 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했다. 손가락이 살짝 미끄러지는 바람에 화면이 아래로 스크롤 됐다.


"어."


[미안.]


'울보'의 밑에 한참의 간격을 두고 짧은 사과가 적혀 있었다.


"…."


나루미야 메이 망할 놈.


자존심만 센 개초딩 자식.


바보 멍청이.


또 눈앞이 흐릿해졌다.


"…훌쩍."


내일 눈 퉁퉁 부어서 연습 가면 어떡하지. 그것도 다 메이 탓이야. 하라다 선배가 진짜 아프게 딱 두 대만 때려줬으면 좋겠다. 뜨거워진 눈을 손등으로 누르면서 생각했다.




Posted by 양철인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