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님 리퀘

겁쟁이 페달 아라키타 야스토모 드림

60분 동안 씁니다ㅇ0ㅇ(실제:100분)




덕밍아웃 이상형




세상은 썩었다.


완전 썩었다.


죽어야지.


죽어버려야겠다.


이런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서 죄송해요. 죽어야겠어요.


"아―경찰 아저씨 여기 자살 희망자가 있는데요."

"사람인가요 좀비인가요."

"반응이 없는데. 그냥 시체인가보다."


세상의 어두메 다크 따위는 모르는 녀석들의 가벼운 목소리가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저 가볍고 밝은 녀석들은 사실 내 친구였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태평한 놈들 같으니라고. 저리 꺼져.


이렇게 말하면 중2병자 같지만,

그렇다.


사실 나는 옆에서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마저도 아무래도 좋을 만큼 절망했던 것이다.


"죽고 싶다…."


왜 인간으로 태어났지? 우리 과건물 외벽의 담쟁이 덩굴이 되게 해주세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하…."


사실 나에게는 오늘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물어봐 주길 엄청 기다렸나보네."


조용히 해.


아무튼, 나에게는 대단히 무섭고도 소름 끼치고도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보자면 개강 2주 전의 겨울방학 때로 돌아가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까지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나의 흑역사가 적립되어 왔다는 말과 같다. 그 정도로 깊은 상처인 것이다. 마치 마리아나 해구 같은 깊이의 상처라는 얘기다.


"음……."


아니다. 역시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얘기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자기 고백을 해야 이야기가 스무스하게 진행될 듯하다. 자기 고백이라고나 할까 덕밍아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말이지….


사실 우리 집에는 모 아이돌 1집 앨범이 30장 있습니다. 2집은 40장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아이돌 더쿠입니다. 수니입니다. 다른 말로 돌덕이라고 하죠. 혹은 감정 있는 ATM이라고도 합니다.


왜?


아이돌 좋아하는 게 나니가 와루이???


내 통장은 옛날 옛적에 최애 멤버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앨범도 굿즈도 CF 상품도 전부 섭렵하고 살아온 지난 2년의 돌덕 인생.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온 건 내 아이돌이 새로운 CF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준국민간식은 내 아이돌을 전면에 내세우며 물건을 팔아치우기 위한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뫄뫄 먹고 팬싸도 가고!!☆


뭐 이런 타이틀의 이벤트였다.


그러니까 물건을 사고 포장지 안의 번호를 입력하면 팬싸를 보내주는지 안 보내주는지 알려주는 뭐 그런 류의 이벤트였다. 다섯 개 이상 사면 작은 포스터(랜덤)도 줬고.


팬싸다. 팬싸인회다. 돌덕이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이벤트 아닙니까? 비록 당첨 확률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어쨌든 다섯 개 사면 굿즈도 받는 거잖아. 안 살 수 없죠. 더러운 쇼비즈 사업가 놈들은 수니의 통장에 있는 먼지까지 털어갈 것이다. 물론 그게 내 새꾸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장기도 내놓을 생각이지만.


더러운 장사꾼들아 셧업 앤 텤마머니!!!


뭐 그랬습니다.


이벤트가 시작된 날 아침부터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물건을 쓸어담아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섯 개 사면 포스터를 주니까 다섯 개씩 끊어서 샀다. 물론 우리집 근처 편의점은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야 있는 옆동네 편의점이 주요 공략 포인트였다.


"520엔입니다."


비록 포장지가 리뉴얼 돼서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내 아이돌의 얼굴이 프린트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편의점에 커다랗게 팬싸도 가고!! 하는 문구가 붙어있다 하더라도! 매일 똑같은 간식을 사고 매일 포스터를 받아간다 하더라도!!


인상이 다소(=굉장히) 더러운 알바생은 그럴 때마다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포스터를 건네줬지만. 내 알 바입니까.


온몸으로 덕밍아웃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수니의 사랑은 그렇게 눈이 멀고 만다.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지…하하하.


어차피 어지간 하면 올 일도 없는 옆동네 편의점이고, 다소(라고나 할까 상당히) 인상이 나쁜 알바생도 편의점을 나서면 볼 일 없는 사이고.


그러니까…수니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는 길에 쓴 우산이 내 아이돌 굿즈였다. 총체적으로 완전 돌았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무튼 여름 방학이 끝나고 이벤트도 끝나고 내 팬싸에 대한 희망도 끝나고 남은 건 포스터 3종 십여 장과 개강 밖에 남지 않았던 그때.


오랜만에 간 학교에서,


나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일코도 뭣도 없이 미친 듯이 날뛰던 편의점 알바생(인상 무지x100 더러움)을.


강의실에서.


그것도 전공 수업(1학년 때 학점 빵꾸내서 재수강해야 하는 과목)에서.


심지어 지정좌석제 옆자리에서.


'아.'


하고 명백히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


험악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듯 마는 듯 꾸벅했다고.


그건 분명히 아는 자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바로 한 시간 뒤 그 수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께 교수님 제 자리에 이의 있습니다!!! 노안이라 글씨가 안 보입니다!!! 라고 했지만 안경 맞추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한 시간 뒤면 그…내 안의 또다른 나를 알고 있는 알바생의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름이…아라키타였던가?


"…역시 죽을까?"


역시 죽자. 녹조류 같은 게 되자. 누군가가 거둬가서 폐기해주겠지. 원핵생물이 되자. 선캄브리아대로 돌아갈 거야.


책상에 쿵 머리를 박았다. 책상 통과해서 죽고 싶다. 진짜 죽고 싶다.


"얘 뭐 홀로홀로 열매 능력에라도 당한 거 아니야?"

"누가 우솝 좀 불러와봐."


망할 년들. 일코해제 당해서 멘붕한 친구한테 해줄 위로의 말이 그렇게 없냐.


"아냐 일코해제를 당했다기 보다는…."

"그냥 너 혼자 신나게 나 오따꾸라고 외치고 다닌 거잖아?"

"전방위로 발싸하고 다녔지."


존나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스요.


역시 죽을까.


"그전에 밥부터 먹지 그래?"

"그럴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니까. 비틀비틀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죽긴 뭘 죽냐. 먹기만 잘 먹네."

"먹다가 뒤질 듯."

"배터져서."

"그래놓고 애꿎은 알바생 탓하지 마라."


닥쳐.


그리고 45분 뒤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학교로 돌아왔다.


나와는 달리 빵꾸난 학점 따위 없는 모범적인 학생들은 각자 알바며 뭐며 뿔뿔히 흩어졌고, 나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영국군에 맞서는 잔다르크가 된 기분을 눌러담으며 강의실로 향했다.


"…."


전후방 좌우를 확인했지만 인상 더러운 알바생의 모습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새내기가 듣기엔 좀 어려운 전공기초니까 수강정정을 했을지도 몰라.


희망을 담아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로 가려던 순간, 뭔가가 등을 툭 쳤다. 문가에서 얼쩡거리니까 빨리 들어가라는 의미인 줄 알고 돌아보며 사과를 건네려고 했지만….


"아, 죄송?!?!"


이 미친. 님 왜 여깄어요???


"어서오세…아 씨."


인사는 왜 하냐 편의점인 줄?????


"편의점에서 맨날 보던 얼굴이라 헷갈리잖아."


손님 얼굴 기억하지 마라. 잊어버려 좀. 잊어버려주세요. 제발요.


"저기요."

"아무튼 들어가게 좀 비키―어?"

"잠깐 얘기 좀 합시다."


강의 시작까지는 5분 정도 남았다. 5분 안에 그 기억…키라세테모라우!!!


"어???"


아라키타의 팔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 강의동 끝 인적이 없는 계단실로 이동했다. 주위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전투태세를 잡은 다음, 아라키타를 노려보며 선언했다.


"비밀로 해줘요."

"???"


안 그래도 험악하니 빈말로도 잘생겼다고 해주기 힘든 얼굴을 찡그린 아라키타를 보고 있자니 이 거래가 성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법이다.


"그…내가 그쪽 편의점에서…사간…."

"아 아이돌 포스터 15장 받아간 거?"


닥쳐. 조용히 말해.


"쯧."


아라키타가 뒤통수를 긁으며 혀를 찼다. 솔직히 좀 쫄았다.


"어, 얼마면 돼!?"


뒷걸음질 칠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외쳤다. 아라키타는 뒷통수를 긁던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손을 뻗어 덥썩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계단실에서 나와 복도를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했다.


설마 이대로 새우잡이 배에 넘겨진다거나??


"야."

"어?"


아라키타의 부름에 정신을 차려보니 자판기 앞이었다. 뭐지. 너 시즈오니. 자판기로 날 칠거니. 만만치 않게 성질은 더러워보인다만.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라키타 보고 있자니, 남자가 턱짓을 하며 툭 한 마디를 뱉었다.


"벱시 한 캔."

"?"

"벱시 한 캔으로 퉁치자고."


헐.


이게 꿈인가 싶어 얼굴을 찰싹 쳤지만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 듯했다.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즉시 벱시를 대령하겠습니다."


알고 보면 얼굴만 험악할 뿐이지 보살일지도 몰라. 미륵보살의 화신인 거지. 그러고 보니 눈매도 좀 닮았네.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지만.


"아."


53엔밖에 없었다.


"…."


그러고 보니 새 학기라고 펜 또 새로 샀었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아사 직전의 지갑을 내려다보며 망부석이 되었다.


죽을까.


"너…아, 아니다."


아라키타는 험악한…아니 보살의 화신 같은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을 꺼냈다. 짤랑짤랑 자판기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야 53엔도 동전 소리는 나겠지만….


아라키타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지갑을 닫았다.


벱시는 다음에 사줘야지….


"벱시 마시냐?"

"어? 응…."


얼떨결에 대답하자 불쑥 시야에 파란 캔이 들어왔다.


"자."

"어…."

"마셔."


뭐, 뭐지. 방금 3초 정도 잘생겨 보였어.


내가 벱시 캔을 받아들자, 아라키타는 한 손으로(!!) 벱시를 따며 앞장서서 성큼성큼 강의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의실로 들어서기 직전에 뒤를 돌아보더니 툭 한마디를 던졌다.


"다음엔 니가 사라."

"…응!!"


어쩌면 오늘부터 내 이상형이 벱시를 좋아하는 남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Posted by 양철인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