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은 들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어느 정도로 들떠 있었느냐 하면 티비에서 두어 번 들은 게 전부인 아이돌 노래를 굳이 생각해내어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발가락으로 박자를 맞출 만큼 들떠 있었다.
"음, 이게 낫나?"
한껏 들뜬 마음으로 머리를 만진 란은 이번에는 허밍을 뚝 멈추고 진지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핑크색 원피스. 너무 본격적인 데이트 복장이다. 기각.
티셔츠에 청바지. 이건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다. 다음.
블라우스. 이 색은 너무 칙칙한 것 같다. 다른 걸로 하자.
란은 거울 앞에 서서 벌써 한 시간 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옷장 안의 모든 옷을 꺼내 보아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색상이 괜찮으면 디자인이 부해 보이는 것 같고, 라인이 잘 잡힌 것 같으면 칙칙하고. 대체 평소엔 뭘 입고 다녔던 건지 과거의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물론 평소라면 이렇게 오래 거울 앞에 서 있을 것도 없이 적당히 잡히는 대로 주워 입고 나갔겠지만. 아무튼 과거의 자신은 무슨 센스가 이렇게도 없어서 옷을 이것밖에 못 산 건지 원망스러웠다.
"끙."
대체 뭘 입어야 하지.
방 안을 뒤덮은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진지하게 고민해봐도 뻔한 코디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첫 데이트니까 좀 뻔한 코디라도 괜찮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그나마 괜찮은 것 같은 옷을 몇 개 골랐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입었다 벗었다 하며 난리를 치고 나서야 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은 코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액세서리를 했다 뺐다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서야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본 시계는 알람을 맞춰둔 시각에서 한참 지나있었다.
"으악!!! 늦었다!!!!!!"
"아 씨. 알람. 알람 못 들었는데."
샤워도 최대한 스피디하게, 옷은 전날 골라둔 대로 빠르게 꿰어 입고 화장도 최대한 빠르게 했지만 약속 장소로 출발했을 때는 이미 약속한 시각이 지나있었다. 첫날부터 이게 뭐람. 란은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렸다. 예쁘게 꾸민 채 구두를 신은 발로 전력 질주 하는 소녀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안 울린 알람을 죽여버릴 거야. 울려도 죽일 테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달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원래 약속시각에서 삼십 분이 늦었다.
"헉, 헉."
란은 숨을 고르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앞머리를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키가 크고 마른 대걸레 같은 실루엣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있지. 혹시 벌써 갔나? 첫 데이트인데 반 시간이나 늦었으니 바람맞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종 괴롭힘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란이 알고 있는 녀석이라면 이걸 괴롭힘으로 받아들여 나 같은 쓰레기가 너의 희망이 될 수 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야!!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따위…아니, 그런 성격 덕분에 이렇게 데이트 약속을 잡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란은 처음으로 그에게 호의를 담아 음료수를 건네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대걸레 같은 놈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음료수를 받아 들어,
'누구한테 전해주면 돼?'
라는 넌씨눈 소리를 했고. 란은 그때 울컥한 나머지.
'너 먹어 병신아!!!!'
하고 음료수를 빼앗아 그의 이마에 혼을 담은 스트라이크를 먹여주었다.
참으로 아련한 추억이다. 란은 다시 울컥 이마에 핏대가 서려는 것을 의지로 억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봤지만 역시 대걸레 머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진짜 갔나."
울고 싶다. 란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쪼다자식."
늦은 건 자신이지만 딱히 들으라고 한 소리도 아니고 아무래도 좋다. 란은 우울한 기분으로 어제 옷을 고르느라 날린 시간과 예매해둔 영화 티켓 두 장과 고심해서 짜온 데이트 플랜을 떠올렸다. 티켓은 환불하고 플랜은 쓰레기통에 처박아야겠다. 첫데이트인데 엉망이네.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을 때,
"왜 그래 란 씨?"
거짓말처럼 눈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헑?! 코, 코마엨."
란은 너무 놀라 헛숨을 들이키는 바람에 사레에 걸리고 말았다. 이름도 반토막으로 씹어먹고서 쿨럭거리는 란을 걱정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괜찮아?"
"어, 어어. 괜찮아. 그냥 좀 놀라서. 내가 늦어서…이미 가버린 줄 알았거든…."
란의 말에 코마에다가 상큼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 같은 쓰레기에게 함께 영화를 보자고 해준 것도 영광인걸."
아니 이 샛기가.
란은 저도 모르게 헤드샷을 날릴 뻔했던 것을 참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지각했으니까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란은 마음속의 인내심 노트를 펴서 우선 한 번이라고 표시해두었다.
"그보다 오늘 예쁘다, 란 씨."
이어진 코마에다의 칭찬에 란이 얼굴을 붉혔다. 어제 한바탕 난리를 친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란은 기쁜 마음에 참을 인 찬스를 한 번 충전해주기로 했다.
"나 따위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렇게 꾸미고 온 건 아니겠지만…영광이야."
바로 소모됐지만.
아무튼 란은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숨기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 그래? 오늘 나오기 전에 아무래도 입을 옷이 없어서 아무거나 입고 나왔는데."
"소레와 치가우요."
▷[입을 옷이 없어서]◁
BREAK!
"란 씨의 방으로 매일 택배가 온다고 들었는데."
"………."
인터넷 쇼핑은 원래 실패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거니까 닥쳐.
영화가 끝났다. 란은 영화관을 나서면서 대작이라며 인터넷에 홍보가 흥했던 영화를 예매한 건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캐스팅은 호화로웠지만 스토리가 기승저어어어언결! 하는 느낌이었던 데다 결국 결말이라는 게 다음 영화를 기대하시랏☆ 하는 느낌이었던 탓이다. 영화값만 날린 것 같다.
"재미없었지?"
한숨을 섞어 그렇게 묻자, 코마에다가 상큼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냐, 란 씨가 나 같은 쓰레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아주 딱 맞는 영화였어. 내 주제에 재미있는 영화를 란 씨 같은 대단한 사람과 보려고 했다면 어불성설이지."
………….
이 자식, 죽일까.
아냐, 참자.
란은 이를 악물며 투아웃을 기록했다.
"…드음은, 흠흠, 다음은 밥 먹으러 갈까? 근처에 맛있다는 데를 알아왔는데."
어금니를 악무는 바람에 발음이 이상해졌다. 란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며 열심히 짜온 데이트 플랜의 다음 단계를 제안했다. 코마에다는 별말 없이 계획을 받아들였다. 란은 안심하며 코마에다를 잡아끌었다.
"이쪽이야."
"아…. 이쪽은 느낌이 안 좋은데."
코마에다가 흐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초고교급 행운'의 직감이 발동한 모양이다. 그 능력에 대해 익히 들은 바 있는 란은 그 말에 토를 다는 대신 밥 다음으로 예정했던 카페로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그럼 이쪽."
"아…. 이쪽은…."
또냐!
"그, 그럼 여기는?"
"아…."
끝났다.
알아왔던 모든 장소가 안 된다는 것 같다. 수강신청에 참패한 대학생 같은 기분이 되어 한숨을 내쉬는 란을 보고 잠시 생각하던 코마에다가 다른 방향을 제안했다.
"이쪽은 괜찮은 것 같아."
"어디…?"
코마에다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하자, 키 큰 건물이 나왔다.
"…백화점?"
"그렇지, 쇼핑이라도 하면 어때?"
마침 어제부터 입을 옷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던 참이라 코마에다의 제안에 조금 혹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보통 쇼핑 싫어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코마에다의 눈치를 살피자, 코마에다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별로 싫어하지 않아. 그보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내가 란 씨가 원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희망적인 일일 거야."
…………….
세 번 지났다. 한 번만 더 해봐라.
란은 마지막으로 인내심 노트에 거친 체크 표시를 그려넣으며 앞장서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 세일 중이구나."
시즌이 바뀌는 시점이라 많은 브랜드가 세일 중이었다. 란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예쁜 옷을 찾아 쇼핑제왕의 눈(쇼핑엠페라.아이)를 발동했다. 그야말로 매와 같은 눈으로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란의 뒤로 코마에다가 붙었다.
"흐으음."
일단 일주를 마쳤다. 머릿속으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브랜드의 정리를 끝마친 란은 힘차게 제일 가까운 브랜드로 직진했다.
이건 컬러는 예쁜데 라인이 안 예쁘네.
이건 디자인은 괜찮은데 소재가 좀 그래.
이건 나쁘지 않은데 가격이 좀 예의 없네.
이건 예쁜 것 같은데 나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어.
마치 오디션 프로의 심사위원이 된 것처럼 디자인 반 가격 반의 심사평을 가차 없이 내리며 수백 벌의 옷을 뒤적거린 끝에, 괜찮아 보이는 원피스를 발견했다.
"오."
컬러도 예쁘고 디자인도 괜찮고 가격도 훌륭하다. 란은 마음 속으로 득템이다!! 를 외치면서 옷을 집어들었다. 탈의실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옷걸이를 몸에 대보면서 히까리를 쫓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코마에다에게 물었다.
"이거 어때?"
코마에다는 그린 것 같은 미소로 대답했다.
"나 따위의 의견이 의미가 있을까?"
"……………."
참을 인 찬스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충전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요 ◀
마음 속으로 검정이 되기로 결심한 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옷걸이를 힘차게 코마에다에게 내던졌다.
"아오, 다 때려치워! 이 또라이야!!!!!"
10점! 훌륭하게 옷걸이를 빈약한 가슴팍에 명중시킨 란은 점원의 얼떨떨한 박수소리를 뒤로 한 채 성난 걸음으로 백화점을 나와버렸다.
"어라…?"
남겨진 코마에다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몸에 맞은 원피스를 주워드는 가운데,
바야흐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첫 데이트는 그만 절망의 승리로 종막을 맞이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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