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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




"어서 와. 저녁 먹을래? 목욕부터? 아니면…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문 앞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적절한 반응을 구하시오(5점).


"어……"


일단 첫 단계. 눈을 의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서서 꿈과 로망의 대사를 하고 있는 건 같은 학교의 학생회장이었다. 보통은 학생회 일을 할 때가 아니면 볼 일이 없는 얼굴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 걸까?


그것도 심지어 내 로망의 앞치마를 착용한 버전으로.


우선 내 눈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하지만 눈을 비벼도 그 모습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눈을 비비면 각막에 손상이 생길 수 있어."


건강에 좋지 않은 행동에 돌아오는 꼼꼼한 지적에서 강렬한 현실성을 느꼈다


"어, 응. 아…카시 군?"

"응? 새삼스럽게 부르네."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부드럽게 웃으면서 돌아본다.


아, 혹시 이건 꿈인가? 꿈이겠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지. 나는 아카시 군을 꿈에서까지 보고 싶었나?


그야 물론 내가 햇수로 2년 째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학교에서 자주 보고 있는 얼굴을 꿈에서 또 보고 있다니 대체 얼마나 좋아하면 가능한 일이지? 내 짝사랑력 정말 놀랍다. 그리고 나 자신이 살짝 소름끼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낯설지만, 아무튼 꿈속에선 여기가 우리 집이거나 아카시 군의 집이라는 설정인 모양이다. 나중에 독립하게 되면 꼭 집에 장식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베네치안 유리 장식이 현관에 있는 디테일함이 놀랍다. 내 뇌는 생각보다 성능이 좋은 모양이다.


현관을 구경하고 서있으려니 앞치마를 벗어 든 아카시 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배는 안 고파?"

"어, 배…별로 안 고픈데…."


오늘은 저녁을 늦게 먹은 편이다. 게다가 자기 전까지 하는 일 없이 뒹굴 거리기만 했으므로 벌써 배가 고파지지는 않았다. 정말 배가 고프다고 해도 꿈속에서 뭔가 먹어봤자 배가 찰 리도 없고.


"운동 다녀온다더니 뭐라도 먹고 왔어?"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운동이라니 아무리 꿈이라지만 양심이 너무 없군.


"그럼 목욕할래?"

"아니…."


꿈에서까지 목욕하고 싶지 않다. 난 이미 침대에 눕기 전에 깨끗이 씻고 왔단 말이야.


그럴 시간이 있으면 깨기 전에 꿈에서나마 아카시 군의 얼굴이나 충분히 봐두는 게 좋겠다. 실물은 이렇게 대놓고 보진 못하니까. 비록 내 뇌내망상 아카시 군이지만 이제껏 지켜봐왔으니 많이 다르진 않겠지.


왠지 보고 있으니 실물보다 조금 더 성숙한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것 같은데…꿈이라서 그런가? 난 사실 좀 더 어른이 된 아카시 군을 보고 싶었던 건가? 이것도 좋긴 하다…여전히 내 자신이 좀 소름끼치지만….


기억보다 한층 더 깊어진 눈과 날렵한 코, 단정한 입매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카시 군이 모양 좋은 입술로 웃었다. 평소보다 대단히 어른스럽게. 그러니까 다시 말해…아주 섹시한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우아한 아카시 군에게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지만 놀랄 만큼 어울렸다. 이런 상상력이 나에게 있었다니.


감탄하며 입을 벌리고 있자니 천천히 다가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카시 군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이 다가왔다.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꿈이라도 이 거리는 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귀 뒤로 넘어간 손가락이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와 등을 쓸어내렸다. 얇은 원피스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저녁도 목욕도 아니면…."


허리 부근에 닿은 손 때문에 숨을 수동으로 쉬어야 했다. 움찔 거리는 나를 빤히 보면서 아카시 군이 낮게 속닥거렸다.


"남은 건 나뿐이네."

"…어?"


내가 멍청한 소리를 낸 것과 아카시 군이 손을 뻗어 가볍게 나를 들어 올린 건 거의 동시였다.


"어, 어어?! 아, 아, 아카시 군?"


아무리 꿈이라지만 공주님안기라니 정말 부끄러울 정도로 양심이 없잖아, 내 무의식!!


"오늘따라 이상하네. 왜 자꾸 그렇게 불러?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네. 그립긴 하지만."

"아니, 아니…."


내 꿈은 대체 몇 살인 설정인데 고등학생 때가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거람. 이름으로라도 부르는 설정인 걸까. 설마.


"…세이쥬로?"

"응. 왜?"

"………."


양심을 버리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진짜냐고. 대체 나도 제대로 정리해본 적 없는 로망이 어디까지 섞여있는 꿈인 건지.


어버버 하는 사이 아카시 군은 나를 안아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꿈인데도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기서 떨어지면 키가 클까? 꿈이 깰까? 깬다면 좀 아깝다. 양심이 없긴 해도 좋은 꿈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카시 군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굽혀 천천히 나를 내려놓았다. 눈을 껌뻑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아카시 군이 상체를 기울였다. 체중에 침대 매트리스가 삐걱거렸다.


…응? 침대?


아니, 아니겠지. 아무리 꿈이라지만 설마 내 무의식이 그렇게까지 파렴치하지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생각이 채 다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카시 군의 얼굴이 훅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 하…."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채 말을 맺지 못한 입술을 핥고 깨물고 나서야 천천히 혀가 입 안쪽으로 침입했다. 꿈인데도 입술 안쪽을 간질이다가 혀를 건드리는 감촉이 예민하게 느껴진다. 그다지 키스해본 경험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데도 입천장이며 혀, 혀의 아래쪽과 입술까지 입 안의 모든 곳을 핥거나 빨아들이는 혀와 입술의 움직임이 능숙하다는 건 분명히 알았다. 키스만으로도 짜릿함이 발끝까지 퍼졌다.


"응…."


꿈속에서 하는 키스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져도 되는 걸까. 아니면 꿈이라서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걸까. 꿈에서 키스해본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어쨌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건 확실했다.


손바닥이 부드럽게 볼을 감싼다. 긴 손가락이 귓바퀴 뒤쪽을 간질이듯이 만지다가 뒷목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차가운 손끝이 목깃 안쪽으로 날개 뼈와 어깨를 스치듯 만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어깨뼈와 쇄골을 덧그리며 앞쪽으로 돌아온 손가락이 원피스의 단추를 풀어 내리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그야 물론 꿈이니까 어떤 의미로는 세상에서 제일 괜찮겠지만,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가슴 한 구석에서 양심이 약간 게으르게 일했다.


다신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다. 이런 꿈을 또 언제 꾼다고. 하지만 이 꿈이 내가 생각한 데까지 간다고 치면 내일 학교에서 아카시 군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모르겠다. 물론 내 꿈인데 나만 말하지 않으면 아카시 군이 알 리는 없지만…아니 하지만 그래도….


내가 잠시 본능과 양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사이 멈추지 않고 움직인 아카시 군은 이제 내 상체에서 원피스를 벗겨내고 있었다. 소매가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대체 뭐가 이렇게 빨라! 물론 달리기도 빠르고 일하는 것도 빠르고 머리 회전도 빠른 건 알았지만 이런 데에 반영될 줄은 몰랐네! 적어도 선택지 고를 시간은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 틈에도 아카시 군은 부지런했다. 흘러내린 원피스의 윗부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 아래까지 끌어내려졌다. 속옷 밖에 남지 않게 된 상체에 손이 닿는가 싶더니 턱 아래와 목, 어깨 위에 짧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긴 손가락이 날개뼈 위로 움직이는 바람에 움츠러든 가슴 윗부분에도 입술이 닿았다.


손끝이 등으로 만져지는 뼈를 하나하나 덧그리다가 스트랩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느릿해서 오히려 야하게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목을 따라 다시 올라온 혀가 귀를 핥는 바람에 등으로 소름이 달렸다.


아무리 꿈이라지만…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상상을 해본 적은 없는데. 내 무의식을 의심해야 할 때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속옷 후크가 풀리는 느낌이 났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가 그대로 뒤로 밀려 침대에 눕혀졌다. 아카시 군이 불빛을 등진 채 웃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어쩌지. 얼른 익숙해져야 할 텐데."


아카시 군의 손가락이 손등을 쓸어내렸다. 이 꿈 대체 무슨 설정이기에 아직도니 뭐니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부끄러운 것보다 당황한 게 먼저라고 생각해. 현실에선 아카시 군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못해봤는걸. 꿈속의 아카시 군에게 말해도 의미 없겠지만.


"바디 로션을 바꿔서 그런가. 전보다 달콤한 냄새가 나."


…아니 지금 그런 TL 대사 같은 거 할 때가 아니고!



(삭제 부분)



"자, 잠깐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카시 군의 손을 붙잡았다. 속옷을 반쯤 끌어내린 손길이 그 자리에 멈췄다.


"싫어? 그만 할까?"

"싫…은 건 아닌데…그…그만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사이 가볍게 들어 올려져 앉은 자세가 됐다. 아카시 군은 고개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런 꿈을 꿔도 괜찮은 걸까. 게임이었다면 도덕심 스테이터스를 제일 먼저 체크해봤을 텐데. 죄책감이 가슴 한쪽을 쿡쿡 찌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죄책감뿐인 건 아니었다.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주제에, 사실은 죄책감보다 설렘이나 기대감이 더 컸다. 나는 아무래도 변태인 게 틀림없다.


"싫은 건 아닌데?"


아카시 군이 내 이마에 이마를 맞대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피부에 닿은 셔츠가 구겨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단단한 손바닥이 어깨 부근을 쓸어내리는 바람에 몸을 떨었다.


"있잖아, 아카…가 아니라, 세이쥬로는."

"응."

"내가 그…세이쥬로랑…야한 짓…을 하는 꿈을 꾸면 어떨 것 같아?"


꿈속의 남자에게 이런 걸 묻는 건 비겁한 짓이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대답 밖에 들려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원하는 답을 들려주길 바랐다. 그만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뜻을 담아서 올려다보았지만,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꿈이니 어차피 내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카시 군이 긴 눈매를 휘며 놀랄 만큼 야하게 웃었다. 


"이상한 걸 묻네. 야한 짓이라니…이런 거 말이야?"

"힉…."



(삭제 부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침대에 누운 채 녹아내린 머리로 멍하니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면서 아카시 군이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이 꿈에서만 몇 번이나 키스했는지 모를 입술이 다시 뺨과 입가에 짧게 입을 맞춰왔다.


"그래도 운동한 보람이 있네."

"응…?"

"오늘은 그래도 중간에 지치진 않았잖아. 나는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지만, 힘든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까."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다정한 손길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옆으로 나를 마주보고 누운 아카시 군이 긴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꿈인데도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꿈속에서 잠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그가 속삭였다.


"그렇지, 앞선 질문에 대답하는 걸 잊어버렸네."


낮은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나는…네가 꾸는 꿈이라면 뭐든 좋아. 네가 그만큼 내 생각을 했다는 뜻이잖아."


이제와서 그런 얘길 해봤자…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이 완전히 감겼다.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잘 자, 하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는 잘 자긴 뭘 잘 자냐!!!


꿈에서 깬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는 것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미쳤나봐. 정말 미친 게 틀림없어. 어떻게, 어떻게 짝사랑 중인 남자애를 상대로 그런 꿈을 꿀 수가 있어! 아니 상상이야 자유지만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꿈 꿀 필요 없었잖아! 그리고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잖아…!


"악!"


침대 헤드를 들이받다가 바로 어제 아카시 군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캔들을 떨어트릴 뻔해서 십년감수했다. 침대 헤드는 안 되겠어. 그런 꿈을 꾼 데다 선물까지 깨먹으면 정말 평생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벽으로 옮겼다. 물론 더 아팠지만 이 정도가 더 좋을 것이다. 얼른 잊어버려야 해. 얼른.


계속해서 벽에 쿵쿵 머리를 박았지만 어젯밤 꿈의 기억은 도무지 달아날 생각을 안 했다. 오히려 갈수록 더….


'벌써 조금 젖었네. 기대했어? 부끄러운 척 했으면서.'


생생하게….


'여기, 엄청나게 젖었네. 꿈에서 이런 걸 하고 싶다는 뜻이야?'


……역시 죽자!


이래서 대체 학교는 어떻게 가지. 가서 아카시 군 얼굴은 어떻게 보지. 본다 쳐도 무슨 말을 하면 좋지. 말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사실 다들 모른 척했을 뿐이고 내가 사토라레면 어떡하지…!


머리로 벽을 108번 두드릴 때까지도 번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 어쩌지. 꾀병이라도 부려야 하나.


하지만 우리 엄마는 꾀병 따위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학교나 가라며 집에서 쫓겨났다.


정말 학교에 가야 하나. 중간에 다른 데로 샐까…갈 곳은 없고 돈도 없지만…. 아니면 가서 아픈 척이라도 하고 하루 종일 보건실에 누워있을까…내 연기력을 믿을 수 없지만….


아주 느릿느릿 걸었지만 결국 길 끝에 있는 건 학교였다. 좋아, 오늘은 딱히 학생회에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교실에만 콕 처박혀 있다가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자. 학생회 일이 있는 날이나 내가 굳이 친구를 핑계로 아카시 군네 반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날이 아니면 아카시 군을 만날 일은 그다지 없다. 그리고 이제 곧 인터하이 결승이니까 아카시 군도 바빠질 것이다. 그 다음은 여름 방학이다. 그 정도 피해 다니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혹시나 화장실에 가다가 마주칠 확률까지 피하기 위해 하루 종일 물도 거의 마시지 않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정말 아카시 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업이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른 집에 가려고 일어난 순간, 거짓말처럼 뒷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카시 군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아, 아카시 군?"


어째서. 왜 이 타이밍에. 조금만 일찍 나갈 걸…! 수업이 끝나자마자 튀어나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내 자리 근처로 다가온 아카시 군이 말을 걸어왔다.


"잠깐 시간 괜찮아? 학생회 일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야 시간은 있지만…. 없다고 대답해도 될까? 아니, 하지만 학생회 일이라잖아….


"어, 으응…."


학생회 일 따위 무시하고 싶지만 아카시 군이 이미 충분히 바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럴 수가 없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아카시 군이 다행이라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학생회실에서 이야기 할까."


교실에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물론 아카시 군이 모르게 지은 죄가 있는 나는 반론 따위 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학생회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너에게만 말해두면 될 일이라서."


아…심지어 단 둘이라니…. 문을 닫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유를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내가 위험한 짐승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대신 뭔가 서류를 꺼내오는 아카시 군에게서 평소보다 세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난 채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전달사항을 이야기 하고 서류철을 나에게 넘기려던 아카시 군이 그걸 눈치 챘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멀리 있어?"

"으, 응? 아니 별로?"


아, 목소리 뒤집혔다. 이거 너무 수상한데.


"오늘 좀 이상하네.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야…."


현실에서 무슨 일이 있진 않았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내 대답에 아카시 군이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더니 눈높이를 맞춰왔다.


"그럼 뭔가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갑자기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내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을 아카시 군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시 군은 그 이상 묻는 대신 영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준 캔들 때문인가."

"응? 캔들?"


어제부로 내 보물 1호에 등극한 그 물건을 말하는 건가. 왜 그 얘기가 여기서 나오지?


"내가 줄 때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전에 향을 맡으면 미래의 일을 꿈으로 보여준대."

"어………."


미래의 일이라니….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는 것 같은데…오컬트샵에서 파는 물건인가? 그런 걸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물론 그렇게 되면 나야 좋겠지만. 아니 좋다기보다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양심이 없다고나 할까….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굴리는 나를 보면서 아카시 군이 낮게 웃었다. 그 얼굴에 꿈에서 본 모습이 겹치는 바람에 뺨이 달아올랐다. 얼른 사라져라 음란마귀…! 고개를 붕붕 저었지만 생각이 잘 떨쳐지지 않았다. 아카시 군이 웃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못 믿겠어? 하지만 나도 같은 캔들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어제 확실히 미래의 일을 꿈에서 봤다고 생각하거든."

"어, 정말…?"


아카시 군이 그런 메르헨 보이인 줄은 몰랐군요…?


못 믿겠다는 표정이 얼굴 전면에 드러났는지 아카시 군이 좀 더 크게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알면 너도 이해할 거야."

"무슨 꿈을 꿨는데?"


혹시 인터하이에서 전국우승 하는 꿈이라든가, 도쿄대에 수석으로 들어가는 꿈이라든가? 뭐 그거라면 확실히 그럴듯하긴 한데.


"너에게 청혼했더니, 네가 승낙했어."

"아 그렇구……."


……….


……네?


손바닥으로 귀를 두드려봤지만 귀가 이상해진 건 아닌 것 같다.


"자, 잠깐만 아카시 군. 내가 지금 선 채로 좀 존 것 같은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 그렇지, 이것도 꿈인가?


"꿈이 아니야. 확인해 볼래?"


그 말에 따라 뺨을 꼬집어봤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깨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꼬집으려고 든 손을 아카시 군이 막았다.


"그만. 멍들겠어."

"어…하지만…."


붙잡힌 손을 아카시 군이 손 전체로 감싸듯이 잡았다. 약간 체온이 낮은 손끝이 부드럽게 손등을 쓸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손가락 사이에 얽힌다. 맞닿은 손가락 사이에서 약간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


"꿈도 아니고 잘못 들은 것도 아니야. 내가 너에게 청혼해서, 네가 그러겠다고 말해줬어."

"…왜…?"


왜 그런 꿈을. 아니 왜 그런 꿈을 꿨다는 이야기를…. 왜 그런 미래를….


"글쎄. 아직 모르겠어?"


말도 안 돼.


이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하는 바람에, 잠깐 숨이 막혔다.


정말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는데.


아카시 군이 진지한 얼굴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더했다.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일까."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얼른 고개를 젓자 아카시 군이 난처한 듯이 웃으면서 내 눈가를 문질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남김없이 거둬간다. 그래도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청혼하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붙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손바닥이 부드럽게 젖은 뺨을 감쌌다. 큰 손이 등을 감싸서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카시 군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그 다음 말을 이었다.


"너를 좋아해.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꿈이 아니라고 믿어줄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것만은 정말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팔이 나를 꽉 끌어안았다. 훌쩍훌쩍 우는 나를 달래듯이 등을 쓸어내린다.


귓가에 쿵쿵 심장소리가 울렸다. 


"대답해주지 않을 거야?"

"조, 좋아해…아카시 군…."


사실은 1년도 더 전부터 좋아했어. 알아. 농구 같은 거 흥미도 없었는데 매번 아카시 군을 보러 갔었어. 그것도 알고 있어.


아카시 군은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에도 일일이 대답했다.


긴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내 울음이 전부 삼켜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게도, 이건 정말로 꿈이 아니었다.

Posted by 양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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