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보쿠시) 드림

*시리즈 4편째





너의 승리는 절대적





라쿠잔의 경기를 보면, 아카시는 늘 벤치에는 앉아있지만 경기에 나오는 순서가 나중이었다. 딱히 아카시가 나오는 경기를 많이 봤던 건 아니지만 저번 예선 때에도 내가 볼 땐 늘 100퍼센트 그랬다. 저번에도 3쿼터 중반이나 4쿼터에 나와서 몇 분 뛰다가 들어간 게 전부였고.


하긴 약간 최종 보스 느낌인데다 나왔다 하면 그 결정 대사 앞에서 다른 학교 선수들은 손도 발도 못 쓰고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쓰러져 갔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내가 아는 농구는 좀 더 이렇게…리바운드…파리채 블록…뭐 이런 거였는데 라쿠잔 농구부 앞에는 그런 열혈의 한 글자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체육관에 모인 갤러리들도 올해의 라쿠잔엔 약점이 없다고 수군거렸다.


보고 있으면 늘 라쿠잔의 승리도 아카시의 승리도 당연한 것이었다. 한 번의 승리에도 기뻐하는 사람은 없다. 전국 대회 최다 우승 타이틀 보유자란 원래 그런 건가. 이러다가 전국 대회 같은 데에서 빨간 머리에 점프 잘하는 농구 초심자가 있는 팀에 지는 최종보스가 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이긴 한데….


하지만 빨간머리는 아카시다. 키는 좀 작고 농구 초심자도 아니고 점프 잘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못할 것 같진 않음), 아무튼 객관적인 사실을 봤을 때 그렇다.


게다가 일단 아직 인터하이 중이고 전국대회는 시작도 안 했다.


아마 아카시는 현실적으로도 만화적으로도 아직 최종 보스 롤일 테니 후반전에야 조금씩 나와서 누군가를 넘어트리는 짓을 여전히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결승리그라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내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야 보러 가고 있으니까.


예정된 경기 시작 시간은 이미 지났다. 버스는 열심히 체육관 근처의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긴 하지만, 도착해도 하프 타임 끝무렵에나 아슬아슬할까. 물론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최대한 열심히 달릴 것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광속의 런닝백 같은 거였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열심히 달려봤자 별로 빠르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최대한 빠르게 내려 열심히 달렸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찼다. 이럴 때면 자가용이 갖고 싶어. 물론 면허는 없지만.


…그보다 뭘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 거지. 어차피 아카시는 내가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를 텐데. 애초에 굳이 꼭 봐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러 오라고는 했었지만 굳이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결국 달리던 걸음을 늦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도착한 체육관은 이제 하프 타임이 끝나 후반전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계속 달렸다면 하프타임 끝무렵에 도착했으려나. 예측이 정확했던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아, 땀 난다.


티셔츠의 목 근처를 펄럭거리면서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캔을 뽑았다. 목을 축이며 들어선 체육관 안에는 저번 예선 때보다 사람이 많았다. 주로 관계자들인 듯 대부분 체육복 입은 남학생들과 그 일행이다.


자리를 찾으며 라쿠잔 측 농구 코트의 상황을 살폈다. 점수차이는 벌써 30점 이상. 다행히 아카시는 아직 벤치인 모양이다. 역시 예상히 빗나가지 않았군.


가슴을 쓸어내리고 앞쪽의 빈 자리를 찾아 앉으니 근처에 앉은 낯선 체육복의 남학생들이 기적의 세대가 어쩌고 아카시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쑥덕거리는 게 들렸다. 아카시, 역시 유명인이구나. 하긴 농구 코트에서 아무나 넘어트리고 다니는 애가 안 유명하면 이상하지. 누구나 그러고 다니는 거였다면 농구라는 운동의 정체를 의심할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트에서 벤치로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헉."


아카시와.


2층에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빨간 머리 아래의 단정한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고 느낀 찰나, 아카시의 고개가 다시 코트 쪽으로 돌아갔다.


"………."


이제 온 거 발견했나?


아니, 아니겠지. 여기 사람이 몇인데. 가수랑 아이 컨택했다고 느끼는 새우젓의 기분 탓 같은 거겠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시 경기를 더 구경하는 사이 속눈썹남이 3점을 추가하는 휘슬이 울었다.


"라쿠잔, 선수 교체!"


아카시가 코트로 들어섰다.


코트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덩치는 가장 작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쩐지 소형견 카페에 사자를 풀어놓은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매우 당연한 흐름으로, 라쿠잔은 굉장한 점수 차를 내며 상대 학교를 이겼다. 인터하이 결승리그까지 진출한 학교라도 상대가 안 되는 모양이다. 


"역시 제왕 라쿠잔…."


그렇군. 과연, 체육복 군단이 속닥거리는 낯 부끄러운 별명이 붙여질만도 했다. 최종 보스에겐 제왕 외의 별명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뭐 어쨌거나 아카시가 소형견 카페의 쟈근 동물 친구들을 학살하는 것도 확실히 봤고, 슬슬 돌아가도 되겠지.


그렇다곤 해도 우르르 몰려 나가는 체육복 남학생들 사이에 낄 생각은 없었으므로 조금 더 앉아서 기다렸다.


다 마신 캔을 구기고 있으려니 핸드폰이 진동하며 라인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어차피 게임 광고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켰다가 깜짝 놀랐다.


아카시 세이쥬로

[가지 말고 잠시 기다리고 있어.

 미팅은 금방  끝날 거야.         ] 읽음


아 미리보기로 보고 못 읽은 척 할걸. 굳이 기다려서 아는 척 해서 뭐하냐. 또 구경거리만 될 거. 이렇게 되면 이미 나갔다고 거짓말을….


아카시 세이쥬로

[한 가지 충고하겠는데, 

 아직 안에 있는 거 알고있으니까

 이미 나갔다고 거짓말 하지 마.   ] 읽음


…아니 이런 빅브라더 같은 놈이.


아카시 세이쥬로

[네 패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야.] 읽음


라인에 한 마디도 안 썼잖아. 혼자서 대답하지 마.


아카시 세이쥬로

[출입구 근처에 휴게 공간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길이 엇갈렸다는 핑계는 용납하지 않아.] 읽음


…내 최종 수단을 어떻게 알았지? 어쩌면 얘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거 아닐까…? 어느 만화 등장 인물이지? 현실 기반이 아닌 건 알겠어.


더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어서 알겠다고 대답을 보내기가 무섭게 읽음 표시가 되더니 라인창이 잠잠해졌다. 몇 분 더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아카시가 이야기한 곳으로 향했다.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대부분 체육복 차림이라 딱히 구경할 것도 없었지만.


오래 안 걸린다고 해도 아직 더 기다려야겠지. 게임이라도 하고 있을까. 음, 아냐. 나한테는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이 없어…. 빛나라 청춘 같은 타이틀을 소리 내서 읽었다간 죽어버리고 말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제일 최근에 받은 건 농구 관련 게임인데 미남 선배가 농구를 가르쳐주는 설정이라 쓸데없이 목소리가 달콤해서 이런 곳에서 켤 수 없다.


결국 나는 이미 다 읽어서 딱히 더 할 것도 없는 트위터나 계속 들락거리면서 불안하게 계속 시간을 때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얼른 집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임라인 새로고침을 열 몇 번째로 하고 있던 때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웬 남자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바로 앞에 서있었다.


"잠깐 괜찮아?"

"…?"


뭐지. 종교 권유? 건강식품 판매? 영감상법? 옥장판? 아무튼 사기?


움찔 놀라면서 가방을 쥐자 남자가 최대한 선량한 얼굴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 너무 경계하지 마.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그쪽이 내 타입이라―"


이건…종교권유인가!


"집에 우환 없고 조상님 아무 문제 없고 종교는 이미 부모님 대에서부터 모태 신앙으로 불교 믿고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다다 준비된 대사를 말했다. 휴, 자주 붙잡히는 바람에 매뉴얼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다단계인가!


"옥장판 정수기 전부 집에 있어요. 건강식품은 안 맞는 성분이 많아서 괜찮고 불운을 막아주는 항아리는 아버지가 자주 사오시니까 저는 굳이 안 사도 될 것 같군요."


이 패턴은 안 익숙할 것 같았냐. 이 쪼렙 사기꾼 녀석 최선의 방어를 맛보아라!


"아니아니 그것도 아닌데."

"?"

"헌팅하는 거야…."


경계하는 눈길을 보내자 남자는 멋쩍은 얼굴로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 메일이나 라인 아이디…알려줄 수 있나 하고…."

"……."


이것이 말로만 듣던 헌팅이라는 녀석이라고? 헌팅인 척 신종 사이비 종교에 끌고 들어가려는 수작이 아닌가? 이럴 땐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걸 주면 연락을 해야 하는 거야? 안 줘도 되는 건가? 안 주려면 뭐라고 말 하면 되지?


생애 처음 있는 일에 대공황을 일으키던 때에 마침 모퉁이를 돌아나오는 아카시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카시 군!"


아카시가 이렇게 반가울 일이냐. 남자를 내버려두고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자 아카시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방향을 바꿨다. 힐끔 내 등 뒤로 남자를 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럴 땐 무슨 얼굴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


별로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만…그보다 굳이 손까지 잡을 필요는 없는데…잡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지만 아카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걸어왔다.


"!"


깜짝이야.


영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체온에 움찔 놀라면서 아카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냉정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나 남이랑 이렇게 손 잡아본 거 처음인데. 되게 이상한 느낌이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아카시는 내 손을 더 강하게 얽어 끌어당겼다. 아카시가 붙잡은 손을 가볍게 당기며 먼저 걸음을 옮긴다. 


"심심하진 않았던 것 같네."


아니 딱히 라인 아이디 알려달라는 소리 들은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책망 받는 기분이 들지….


"그보단 당황스러웠는데…."


웅얼웅얼 대답하자 아카시는 어쩐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왠지 부끄러워져서 깍지 껴진 손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아카시의 손 안에 끼어 있는 내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게 영 다른 사람 일 같다. 몇 번인가 더 손가락을 구부려보는데 아카시의 엄지가 가볍게 손등을 쓸었다.


"!"


이건 또 뭐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눈이 가늘게 휘었다.


"미, 미팅은 다 끝났어?"
"조금 전에."


꽉 붙잡힌 손가락 끝에서부터 열이 나는 것 같다. 열기는 금방 얼굴까지 번졌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손부채질을 했지만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줄 생각이었어?"

"어?"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카시가 눈짓으로 내가 아까까지 있던 곳을 가리켰다.


"연락처."


그걸 꼭 물어봐야 아니.


"……그럴 리가……."


트친도 아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랑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내 극단적인 사회성 없음을 무시하지 마라. 타이밍 좋게 아카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결국 도망치든가 했을 것이다.


"거절하는 말을 안 하고 있길래."

"듣고 있었어?"

"들렸어."


들렸으면 빨리 좀 와라. 죽을 뻔했잖아. 낯가려서.


"뭐라고 해야 되는지 몰라서…."


이의있음! 뭐 이럴 순 없잖아. 전에 이런 적이 있어봤어야 알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되잖아."

"그런 게 있어야 바로 생각이 나지."


말문을 흐리자 아카시가 약간 불만스러운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눈으로 말하는 것 좀 그만 하면 안 되겠니.


"말했을 텐데."

"뭐를…."


난 얘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불안하더라. 또 무슨 남의 생각은 요만큼도 안 하는 낯 부끄러운 소리를 제멋대로 할까 싶어서.


불길한 예감에 슬쩍 손을 빼려고 해봤지만 물론 아카시는 내 손을 놓아줄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네가 패배하는 미래는 절대적이야."


가라앉은 목소리가 선언하 듯이 말하면서, 붙잡힌 손이 끌어당겨졌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들어올려진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한 마디면 돼."


아카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양 뻔뻔한 낯으로 가볍게 내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붙잡혀 있던 손이 풀려났다가, 다시 손끝을 잡혔다.


"그러면 너에게 모든 권리를 줄 테니까."


체육관의 복도 저쪽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시! 하고 누군가가 아카시를 부르는 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아카시가 그쪽을 향해 뭔가 말하자 다시 발소리가 멀어진다. 그것까지도 영 현실감이 없었다.


"가봐야겠어."


아카시는 그렇게 말하더니 그제야 내 손을 놓았다. 손가락 끝에 이제야 피가 통하기라도 하는 양 찌릿 전기가 오르는 느낌이다.


"2경기도 보러 와. 이번에는 늦지 마."


모든 것이 영 희뿌옇게 웅웅 대는 가운데 아카시의 얼굴만 선명했다. 고양이 같은 눈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카시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그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까지 멍하니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 고개를 내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불에 타는 것 같이 뜨거웠다.


더운 것은 날씨 탓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보쿠시 대사에는 왠지 할리퀸 테이스트를 첨가해봅니다

Posted by 양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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