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드림 전력
*주제: 넘어 와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 드림
*캐붕 주의...
나에게 공략되지 않으면 2D라도 죽인다
인텔리한 인상의 미남이 우수에 찬 시선을 보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가슴 아픈 예감이 온다.
'미안해….'
아 역시.
촉촉히 젖은 눈빛이 거절의 말을 건네왔다. 밀려오는 슬픔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널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어.'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을 못 하겠다니 이제껏 데이트며 기습 키스며 스킨십 이벤트는 다 뭐였단 말인가. 넌 여동생이랑 그런 짓하냐. 병원에 가든가 감옥에 가든가 해라. 이를 갈았지만 내가 마음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어떤 태클을 걸건 간에 한 번 떨어진 거절 선고가 취소되는 일은 없었다.
'안녕.'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달콤한 목소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감정에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말았다.
두근두근 학생회: 빛나는 청춘의 당신과 나
-Fin.-
플레이어의 속도 모르고 화면의 엔딩 크레딧은 착실히 올라갔다.
스토리 볼륨도 대폭 줄인 스마트폰용 오토메 게임에서 이렇게 좌절과 실패를 맛볼 줄이야. 한 번 끝까지 플레이 하는 데에 이십분 남짓이라고 해도벌써 세 번째 배드 엔딩이다. 이러려고 게임을 시작했는지 자괴감이 든다. 이제껏 쏟아부은 시간과 코인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앞서 공략했던 다섯 명의 공략캐들은 많아봐야 배드 엔딩 한 번으로 무난하게 공략했는데. 얼굴이 제일 내 취향이었던 학생회장 캐릭터를 마지막으로 미뤄둔 건 맛있는 걸 나중에 먹고 싶은 취향 탓이었지 라스트팡으로 끝나지 않는 좌절을 맛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지. 호감도는 무난하게 찼던 것 같은데.
데이트를 한 번 튕길 걸 그랬나? 죽은 여동생 이야기를 꺼낼 때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 말을 끊고 뺨을 쳤어야 했나? 생일 선물로 미니 불상을 줬어야 했나?
교과서적인 엘리트 왕자님 학생회장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공략 포인트가 있었던 걸까. 지금이라도 공략법을 찾아볼까…아니, 아니야. 그다지 인기도 없는 게임인데도 굳이 트위터에서 단어도 뮤트하고 리트윗도 끄고 스포를 밟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너무 아깝다.
"으윽…."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 하다보면 감이 오겠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버릴 거지만.
"혼자 뭘 그렇게 끙끙 거리고 있어?"
끙끙대며 고민한 끝에 결국 다시 첫만남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기 위해 타이틀을 터치한 순간, 불쑥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말을 걸어온 것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 목소리다.
"어, 아카시 군…안녕."
갑자기 말을 걸어온 것은 빨간 머리의 아카시 세이쥬로 군. 1학년인데 학생회장. 금수저인데 수석. 173인데 농구부 주장. 일본인인데 오드아이. 리얼충인데 중2병. 뭔가 이상하게 설정이 과잉 된 것 같은 교내 유명인사 소년이었다.
"오늘도 게임 중이야?"
"응."
"수험은 정말 버렸나보네."
"내버려 둬…."
왠지 딱히 접점도 없는 두 살 연하의 운동부 소년이 스스럼 없이 반말로 말을 건네거나 시비 비슷한 것을 걸어 오게 된 데에는 약간 사정이 있다.
지난 달 옥상 구석에서 다른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근처에서 존재감 없는 클래스 메이트에게 말을 건네는 아카시를 보고 만 탓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라노벨이 뭔지도 모르는 리얼충 같은 반응을 보이다 말고,
'재미있군. 더욱 마음에 들어.'
…라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반말을 찍 내뱉는 아카시를 목격하고 만 탓이다.
요즘 운동부는 2년 선배한테 반말을 해도 괜찮나? 세상이 그렇게 힙해졌나? 하긴 1학년이 주장인 것부터 보통이 아닌 부라고 생각했다…면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다가 오드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강제 통성명을 당했던 것이 아직도 선명하게 억울한 기억이다.
"마유즈미라면 지금 옥상에 없는데."
"알고 있어. 딱히 찾으러 온 건 아니야."
아카시는 내 고급 정보를 쿨하게 무시하며 옆자리에 와 앉았다. 바람에 빨간 머리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펄럭이는 셔츠 자락에서 운동부 남자애답지 않게 상쾌하고 고급스러운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향 좋다. 부잣집 도련님이니까 비싼 향수겠지. 남몰래 코를 킁킁 대고 있던 사이 로딩이 완료된 게임이 큰 소리로 타이틀을 읽어주었다.
"두근두근 학생회!"
앗. 볼륨 줄여놓을 걸. 아무도 없다고 방심했다. 뒤늦게 볼륨을 줄였지만 아카시는 이미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학생회? 이게 게임?"
오늘도 리얼충 같은 반응이다. 라노벨도 모를 때부터 알아봤지만.
"오토메 게임. 학생회장을 공략하는 거야…."
"학생회장을?"
"아니 너 말고. 게임에서."
"그런 게 재미 있어?"
"일단 얼굴이 재미 있고…성취감이 있지. 이미 세 번째 실패했지만."
"흐음."
뭐 오토메 게임의 게임성에 대해 이야기 해봤자 게임뇌도 갖고 있지 않을 게 뻔한 리얼충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대충 애매한 설명을 해준 뒤 다시 화면에 불려나온 철벽남 엄친아 학생회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적인 인상의 잘생긴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디폴트 네임! 오늘도 힘내자.'
이름은 귀찮아서 안 바꿨다.
▷ 안녕하세요, 회장! 오늘도 멋지시네요!
▷ 열심히 할게요!
▷ 회장, 머리가 높아요.
나는 옆에서 아카시가 화면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는 것을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신중하게 선택지를 노려보았다.
▶회장, 머리가 높아요.
옆에서 불쑥 뻗어나온 손가락이 제멋대로 제일 도라이 같은…꼭 지 같은 선택지를 눌렀다.
"……."
"왜 그렇게 봐?"
옆에 앉아있는 아카시를 어이 없이 보고 있자니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어쩐지 보러 오라고 했던 인터하이 예선에서 계속 머리가 높다면서 지보다 키 큰 선수들 자꾸 넘어트릴 때부터 알아봤다, 이 중2병아! 너보다 머리가 낮은 애가 농구를 어떻게 하냐!
"…뭐 하니? 나 세 번 실패했다고 말 안 했나?"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까인데. 엄청나게 신중해질 타이밍이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결국 엔딩을 포기하고 삭제하는 루트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제껏 투자해온 시간이 광광 운다. 내가 절규하며 화면을 터치하지도 못하고 있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아카시가 양심 없이 결정 대사를 뱉었다.
"패배자를 도와주는 거잖아. 나는 늘 승리하니까 내 선택이 옳아."
"뭐라는 거야 이 겜알못 리얼충이!!!!"
하도 뻔뻔해서 멱살 잡을 뻔했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아오 진짜."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아카시가 손을 뻗어 멋대로 내 스마트폰을 건드렸다. 뭔가 스크립트가 지나갔지만 읽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흥미로운 듯이 화면을 들여다보는 아카시에게 넘겨주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어차피 실패할 텐데 받아서 다시 깨면 되겠지. 그저께부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으니까 한 턴 정도는 쉰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는 턱을 괸 채 구름도 없는 하늘이나 아무도 없는 옥상을 번갈아 의미 없이 보다가, 결국 읽는 건지 마는 건지 스크립트를 휙휙 넘기며 아무 선택지나 고르고 있는 아카시를 구경하기로 했다.
"……."
이 녀석 속눈썹 엄청 기네. 아직 앳된 기가 남은 뽀얀 옆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그 손에 들린 내 스마트폰이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 된 것 같다. 조회 때마다 괜히 여학생들이 이 녀석의 이름을 속닥거리는 게 아니다 싶긴 하다. 아무튼 아카시는 애가 성격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얼굴은 객관적으로 잘생기기는 한 것 같……아니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한참만에야 아카시의 얼굴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손에 파묻은 뺨이 화끈거렸다. 아니 대체 아카시가 어떻게 생겼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얼굴을 오래 관찰하고 난리야.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다. 조금 죽고 싶다.
"왜 그래?"
다행히 아카시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진짜 다행이다.
"아니야 아무것도…."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서 떼어낸 양손에 스마트폰이 돌아왔다. 뭐야, 벌써 실패했…
'미안해. 역시 널 여동생으로는 생각할 수 없어.'
어.
'좋아해, 디폴트 네임.'
어어.
'어느 날부턴가 정신을 차려보니 늘 네 생각 뿐이었어.'
"헐."
성공한 거냐.
"너 이거 어떻게 성공했어?!"
"나에게 패배란 없어."
그거 게임에도 적용되는 거였냐. 그 무슨 아이…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름의 그 눈이 2D에도 적용된다거나 그런 건가. 설마 아카시가 나보다 소녀심잘알이라고 하지는 말아주라.
입을 벌린 채 엔딩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카시가 툭 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대사도 이상하고 성취감을 느낄만한 시스템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취향이네."
"너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툭하면 눈이 어쩌고 머리가 높고 어쩌고 해대는 중2병이 남의 대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성취감이나 재미는 현실에서 느끼지 그래."
"현실에서 성취감이나 재미를 느낄 일이 뭐가 있다고."
2D나 끌어안고 살다 죽을 거니까 내버려둬라 리얼충아. 적당히 대답하며 수집된 일러스트를 구경하려던 내 손을 가로막은 것은 아카시의 목소리였다.
"내 얼굴은 재미 있었잖아?"
"억."
눈치 채고 있었냐!!
아카시는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질 뻔한 내 스마트폰을 붙잡아 손바닥 위로 돌려주었다. 손바닥 위에서 게임의 BGM이 작은 소리로 울렸다.
"아직도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뭐를.
뻣뻣하게 굳은 채 옆을 돌아보자, 턱을 괸 아카시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선언했다.
"늦건 빠르건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 얼른 넘어오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일단 쓰긴 했지만 과연....보쿠시가 연애를 할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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