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드림 60분
*다이아몬드 에이스 나가오 아키라 드림
*아키라 파주세요
삶은 서프라이즈의 모습을 한 가련한 야수
시끄러운 점심시간의 교실에서 아키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제목을 확인하니 얼마 전에 나온 추리 소설 신간이다. 집중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추리소설 같은 것의 활자가 눈에 들어올 줄이야. 대단한걸.
대단한 아이에겐 상을 줘야지.
"아키라, 뭐 봐?"
슬쩍 다가가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걸자 아키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제 산…아 잠깐만."
순진하게 대답하려던 아키라가 급하게 말을 끊었지만, 하하 이미 늦었다! 목표를 센터에 놓고 스위치!
"그거 범인 주인공 친구!!"
받아라 내 혼신의 스포일러 공격!
"아, 으아악!!!"
평정심을 잃었군. 이겼다.
2/3쯤 읽은 책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는 아키라를 보고 허리에 손을 얹은 악당 포즈로 하하하 웃었다.
"하하하하 오늘도 내가 이겼다!!"
"아…아 진짜."
좌절해서 책상에 머리를 박는 아키라에게 당당하게 오백엔 동전을 내밀었다.
"이제 내 주스를 사러 다녀와라, 패배자. 오렌지야. 사과 포도 안 돼."
"하………."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키라에게 상세한 오더를 넣어놓고 대신 자리에 앉아주었다.
"너희 그 서프라이즈 내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슬슬 질릴 때 안 됐어?"
"아마 올해 지역 예선 시작하면?"
질린 얼굴을 하는 친구에게 웃어보인 뒤 아키라의 책을 뒤적거렸다. '독자와의 대결' 페이지가 나오기 직전이니까 그럭저럭 스포일러 타이밍도 괜찮았군. 어쩐지 효과가 좋다 했어.
"2년 넘었는데 안 질리니?"
"음, 아직은 아키라가 더 수행을 해야 하니까 별로."
2년 째 이어지고 있는 이 장난은 서로 장난을 쳐서 먼저 평정심을 잃는 쪽이 하루 셔틀이 되는 기묘한 내기다. 승률은 거의 반반이었지만 최근엔 내 쪽이 더 많이 이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키라가 평정심을 유지를 못하는 건지 내가 걔를 잘 놀래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셔틀 개꿀.
"여기, 주스."
"빨리 다녀왔네. 수고했어, 패배자."
한숨을 쉬는 아키라에게서 주스를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치 내기는 끝났으니까 나도 내 교실로 가야지.
"이따 봐, 아키라."
"어. 잘 가."
시끄러운 복도로 나오면서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키라는 나한테 스포 당한 추리소설의 표지를 노려보다가 다시 책을 펴고 있었다.
아키라와 나의 내기에는 몇 가지 룰이 있다.
1. 서로 놀라게 해서 평정심을 잃는 쪽이 하루 한 번 부탁 들어주기
2. 서로 하루에 한 번씩만 도전하기
3. 장난은 신체적 금전적 피해가 없도록 할 것
4. 장난 때문에 지나치게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뭐 대충 이런 정도의 간단한 룰이다.
시작은 고등학교 1학년의 늦봄이었나. 중학교는 후보선수로 졸업한 아키라가 고등학교에서는 경쟁력을 키우겠다며 너클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너클볼러에게는 마음의 평정이 중요하대. 참선의 마인드라는 거지."
아키라의 말에 내가 그 '참선의 마인드'라는 녀석의 수행을 돕기로 마음 먹고, 아키라가 졸고 있던 사이에 앞머리에 내 핑크색 마이 멜로디 핀을 꽂아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 다음 쉬는 시간에도 다다음 쉬는 시간에도 눈치 채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이나모토에게 지적 받고 와선 얼굴을 붉히는 아키라에게 'May the force be with you…' 라고 근엄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점심 시간, 아키라는 내 필통 안의 볼펜심들을 죄다 빼서 색을 뒤섞어놨다.
그 날 이후로는 며칠 내내 전쟁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아키라와 나는 서로의 약점을 지나치게 잘 알고 활용했다. 며칠 동안 아키라와 나는…필통에 지우개 가루를 털어넣거나 명탐정 코난의 인물 소개 페이지에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두거나 하며 서로의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후에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가 바로 내기의 룰이다.
이름하여 <참선의 수행>.
덕분에 아키라는 내가 탄산수를 흔들어서 건네준 날에도 평정을 유지했고, 나는 내 서랍에서 거미 모양 장난감이 나온 날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게 됐다. 서로서로 극한의 서프라이즈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마음을 수련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사실 내가 아키라에게 장난을 치고 내기에서 이기고 셔틀로 부려먹는 건 철저하게 아키라의 너클볼을 위한 마음의 수련이다.
그러니까 그 어느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평정심을 지키는, 바로 그 '참선의 마인드'의 수행을 돕기 위함이었다.
딱히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정말이라니까.
…는 나도 솔직히 반쯤은 핑계였는데.
놀랍게도 정말 아키라가 그 '참선의 마인드'로 던지는 너클볼이 족족 상대를 당황시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 핑계가 정말 유용하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준결승 진출!!"
나의 소꿉친구, 참선의 마인드 수행자, 너클볼러의 에이스는 20년 연속 1회전 패배를 기록해온 도립 사쿠라자와 고교 야구부를 서도쿄 지역 예선 준결승까지 올려놓았던 것이다.
솔직히 야구는 만화로 배운 게 전부인 야알못이라 너클볼이고 뭐고 그냥 내기의 핑계였을 뿐, 대단한 건 몰랐는데 소위 격전지라는 서도쿄에서 준결승까지 올라간 걸 보면 진짜 뭐가 엄청나긴 한가 봐.
"준결승 상대는…이나실업? 초 강호교잖아. 작년에 코시엔 나가지 않았어?"
"응. 이나실업, 세이도, 이치다이산. 서도쿄 전통의 3강이지."
"우와…이쯤 되니까 대단한 학교들이 나와버리네."
준결승 쯤 오고 나니 상대로 신문에서 봤던 것 같은 학교 이름이 등장한다. 이나실업이라니 야알못인 나도 들어봤을 정도인데 아키라도 긴장하지 않았을까. 옆에서 걷고 있는 아키라를 힐끔 올려다봤다.
"왜?"
"아니야. 아키라…내일 힘내."
"고마워."
가로등을 등지고 아키라가 씩 웃었다. 어쨌든 표정은 멀쩡해서 다행이다. 그동안의 수행이 성과가 있었다고 자화자찬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내일 말이야."
"응?"
"응원 올 거지?"
"가야지. 참선의 마인드 수련 효과도 확인해야 되고."
"하하핫."
학교에서부터 우리 집 근처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아키라는 이보다 두 블럭 더 가야 하니까 골목 앞에서 헤어진다.
"잘 가, 아키라. 푹 쉬어."
인사하자 아키라가 마주 손을 흔들었다.
"내일도 이겨!"
"응."
그리고 사쿠라자와는 이나실업에 패배했다. 11대 0, 5회 콜드패였다.
마지막 여름이 끝났다.
아키라도 야구부원들도 다들 울었고, 감독님도 우셨다. …그리고 나도 조금. 코시엔에 나가는 게 아키라의 꿈이었는데. 상대 학교가 너무 강한 게 불공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전통의 강호라고 칭찬해야 할까. 나로서는 약간 얄밉게까지 느껴지지만.
제 3자인 나에게도 이 정도인데 아키라에게는 더 그렇겠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From: 아키라
잠깐 집앞으로 나올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해서 달리 연락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준결승 며칠 뒤 아키라한테 연락이 온 건 조금 의외였다.
메일을 확인하고 얼른 뛰어나간 집 앞에 아키라가 서 있었다.
"아키라."
"왠지 오랜만이네."
"응…."
살짝 눈밑은 어둡다. 그래도 표정이 완전히 굳어있거나 하지 않아서 안심했다.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를 끝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괜찮아?"
"응. 어쩔 수 없지, 뭐."
어조도 나름대로 홀가분…한 건가.
"잠깐 걸을래?"
"어, 응."
대충 급한 대로 슬리퍼를 신고 나오긴 했지만 잠깐이면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아키라를 따라서 슬슬 걷기 시작했다. 여름밤의 길거리는 한산했다.
"우리 내기는 계속 할까?"
"어? 여름에 끝나는 거 아니었어?"
"나, 대학 가서도 계속 하려고. 야구."
"정말?"
올려다본 얼굴이 씩 웃었다. 와, 다행이다. 야구 계속 하는구나.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구나.
"잘 됐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치 장난 칠건데."
"야 우리 사이에 무슨 예고제를―"
손을 들어서 아키라의 팔을 툭 쳤다. 옆에서 뻗어온 아키라의 손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딱딱한 손바닥이 이상하게 뜨겁다.
"좋아해."
…어?
뭘 잘못 들었나?
"좋아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 정말로? 나가오 아키라가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거야?
"아, 지금 놀랐다. 내가 이겼네."
아니, 아니 잠깐만. 이건 아니지.
"…야, 뭐야. 이거 룰 위반이잖아! 야!"
아키라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썼지만 아키라가 씩 웃는 게 빨랐다.
"내가 이겼으니까 나 소원 들어줘야지."
"못 들었냐! 이거 반칙이라고!"
자유로운 손으로 아키라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지만, 악력 70kg 위엄은 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이 자식 뭘 먹고 이렇게 손 힘만 세서. 큰 맘 먹고 손등을 꼬집으려고 했는데.
"나랑 사귀어줘. 그게 내 소원."
………어?
"오늘만이 아니라 쭉."
"…어어?"
"계속 옆에 있어주라."
………….
놀라지 않았다. 놀라진 않았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싫어? 이런 소원은."
"어……."
아니.
아마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음 순간 바로 아키라가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을 리 없으니까.
첫 남자친구도 첫 고백도 첫 포옹도,
전부 서프라이즈 투성이였다.
사귀고 난 뒤로도 대학에 가서도 내기는 계속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뭐 요즘은 거의 내 승률이 100%라는 점이 좀 다르지.
"아키라."
"응?"
"오늘 우리 집에 엄마 아빠 없는데."
"……………아 제발."
거 봐. 오늘도 내가 이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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