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지사키 라이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연(4)





말하는 순간 백 바퀴라도 더 돌 것 같은 결심을 한 모양인 여자아이를 그 자리에 붙잡아두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 후지사키 라이무는 예측이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생명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여기서 뭔가를 더 말해봐야 잔뜩 겁을 집어먹은 후지사키 라이무의 귀에는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었다.


"후지사키 상."


파드득 놀라서 고개를 드는 여자아이를 보며 아카시는 다시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우선…음료라도 한 잔 더 마실래?"

"가, 감사…."


본인이 사온 음료수를 본인이 마시면서 감사의 인사를 하는 묘한 풍경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지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 언제 멍멍하고 말하면서 백 바퀴를 돌지 모르는 상대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재미있는 소설을 두었더군…같은 서론만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섬세하게 말을 골라 적당히 경계를 풀 만한 이야기를 한 뒤 본론으로 진입해야 한다. 단언컨대 지난 윈터컵의 결승도 이렇게까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었다.


아카시는 상대의 수를 예측하는 일류 장기 기사 같은 눈으로 맞은편의 겁먹은 햄스터가 조심스럽게 단팥죽 캔을 집어 드는 것을 관찰했다. 그걸 본 순간 어느 친구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구 이야기만큼 긴장을 풀기 쉬운 이야기도 얼마 없으니 화제를 정하는 건 쉬웠다.


"단팥죽을 좋아해?"


운을 띄우자 라이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라이무가 자신의 손에 들린 캔을 내려다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헉, 이게 뭐야!"


아무래도 아무거나 집어 들었던 모양이다. 이 화제는 실패였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른 걸 마시는 게 어떨까?"

"감사합니다…."


단팥죽을 내려놓은 라이무가 이번에는 신중하게 딸기우유를 골라 들었다. 여전히 그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었지만 역시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실패한 단팥죽을 대신해 다른 화제를 고르는 게 먼저였다.


역시 칭찬 작전으로 가는 게 좋을까. 이미 한 번 불신을 사긴 했지만, 작가란 아무튼 자의식이 대단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직업이다. 칭찬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더욱 적절했다. 게다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아카시는 라이무가 딸기우유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마시는 중간에 말을 걸어서 우유를 뿜거나 사레들리게 만드는 사태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십몇 분 사이에 거기까지는 적응하게 되었다.


"다 마셨어?"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라이무가 우유곽이 홀쭉해지도록 열심히 우유를 비우고 나서였다. 기다린 보람이 있게 라이무는 약간 흠칫하긴 했지만 참사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아무튼, 후지사키 상."

"네, 넵!"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건 정말이야."


다시 불신에 가득 찬 눈초리가 날아오기 전에 아카시는 옆에 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나온 건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학생이 목줄을 매고선, 그 줄의 끝을 붙잡은 붉은 머리 오드아이 여학생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일러스트 표지의 라이트 노벨이었다.


<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건> 2권이다.


"2권도 구입했거든."

"……."


그의 손에 들린 <회장개> 2권을 발견한 라이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환태평양 지진대가 울고 갈 듯한 진동이었다.


아카시는 이 표정을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직접 서점에 가서 <회장개> 1권의 표지를 보여주며 2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질문을 받은 직원이 이것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라이트노벨 비슷한 것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후지사키 상?"

"지, 직접…돈을 내고…사셨…다고…?"


당연히 훔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책을 훔치는 장면이라도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라곤 도서관에서 남자 주인공을 발판으로 썼던 것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야,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는 책을 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아마존에서 산 게 아니고…?"

"기숙사로 택배 물품을 받아본 적은 없어."


영문을 모를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자 라이무는 한층 더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한계까지 커져서 곧 굴러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대화를 시작한 후로 지금껏 후지사키 라이무는 내내 놀라거나 겁먹고 있었지만, 또 그것과는 결이 다른 경악이다. 그로서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서브컬처 창작물에 가까이 갔던 적이 없다. 어릴 적부터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의해 엄선된 서적들뿐이었고, 그가 이제껏 접한 텍스트 중 가장 오락성이 있다고 할 만한 작가는 알렉상드르 뒤마 정도다. 하다못해 포켓몬스터조차 접해보지 못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알아도 몽키 D 루피는 모르고 오드리 햅번은 알아도 아야나미 레이는 모른다. 데즈카 오사무나 타카하시 루미코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나 프랜시스 베이컨이 더 익숙한 희귀종인 것이다. 서점에서 라이트노벨을 사는 남학생에 대한 인식을 알 리 없었으며 앞으로도 알게 될 일은 없을 예정이었다.


"후지사키 상?"


재차 이름을 부르자 라이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수습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서점에서 파니까 그럴 수도 있지…하고 또 다시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린 후에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구입해주셔서 감사함다…."


이번에는 의외로 평범한 반응이다. 역시 칭찬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다음 권은 언제쯤 나오는 거야?"

"아마 조만간…나오면 제일, 제일 먼저 드릴게요."

"그건 고마운 이야기네."


정말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나긴 헛다리 끝에 드디어 대화가 궤도를 찾았다. 이제 정말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넵."


아카시 세이쥬로는 처음부터 가장 궁금했던 단 한 가지 의문점을 이제서야 입에 담았다.


"여자 주인공 캐릭터의 이중인격 설정은 어떻게 나왔는지 물어도 될까?"


<회장개>의 여주인공 미츠보시 아카네는 이중인격이다.


그리고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명 있었다.


다른 쪽의 그와 지금의 그가 바뀌게 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중학교 시절 팀메이트와 현재 팀메이트 중에서도 일부뿐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전의 그와 지금의 그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후지이 무라사키, 즉 후지사키 라이무는 그가 이중인격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단순히 그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 그가 후지이 무라사키를 찾은 유일한 목적이었다.


"……."


아카시 세이쥬로는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을 응시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더 당황해서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이렇게까지 당황할 질문이었던가. 어쩌면 이 겁 많은 여자아이에게는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그게, 저기. 아, 어."

"천천히 얘기해도 괜찮아."


부드럽게 다독이는 말을 건네자 라이무가 심호흡을 했다.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던 라이무가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


중학교까지 거슬러 가는 건가? 아카시는 테이코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가,


"오드 아이인데 이중인격이고…얀데레와 메가데레를 오가는 타락천사가…전생한 소꿉친구인 설정을…만들어서…그…."

"음…."


드물게도 말을 잃었다.


우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제발,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뭐든 할게요…."


그리고 대체 뭘 비밀로 해달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상대방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정말 드문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가는 이제 귀와 목까지 새빨갛게 된 라이무가 정말로 펑 터져버릴 것 같았으므로 우선 이해한 척 하기로 했다.


"…그래, 알았어."


의미조차 모를 말을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정말이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멍멍이라고 하지도 않아도…?"

"그런 건 됐으니까."


다시 그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눈 끝에, 아카시 세이쥬로는 후지사키 라이무의 세 가지 비밀 중 두 가지를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Posted by 양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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