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3자
"이르미, 우리 헤어지자."
파호라=리타가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저녁 식사가 끝나갈 쯤이었다. 접시를 거의 비워가던 이르미=조르딕은 그 갑작스러운 말의 의미를 파악하듯이 고양이형의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헤어져?"
"그만 만나자는 뜻이야."
친절하게 해석을 덧붙여주는 파호라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헤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녀가 이르미와 연인 관계를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은 확실히 전달 되었다.
"그동안 생각 좀 했어. 역시 너랑은 못 만날 것 같아."
꽤 오랜만의 데이트였다. 지난 의뢰의 일정에 조금 차질이 생겨 예정보다 며칠 시간이 더 소요되었던 탓이다. 약간의 시간 착오는 있었지만 이르미는 평소대로 신중하게 대상을 처리했고 평소대로 파호라와 데이트 약속을 잡았으며, 역시 평소대로 무난하게 데이트를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았지만 역시 평소와 다를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왜?"
이르미의 물음에 식사를 마친 파호라가 포크와 나이트를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숨이었다.
"저번에 너희 집에 갔을 때부터 생각했는데…너희 집 시월드 장난 아닐 것 같아서 안 되겠어."
시월드? 이건 의미를 모를 말이다. 채 묻기도 전에 파호라가 설명을 이었다.
"시집살이 엄청 할 것 같다고."
"……."
시집살이. 이 말이라면 이르미도 알고 있다. 하지만 파호라에게 예언하는 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일인가? 게다가 조르딕에는 수많은 고용인들이 있다.
"우리 집 가사노동은 전부 집사랑 메이드가 하는데."
"그건 알아."
그게 아니라면 왜?
이르미는 마지막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면서 파호라를 처음 집에 초대해 자신의 가족들과 만나게 했던 날을 떠올렸다.
오늘 데이트와 그 전의 의뢰가 있기 직전이었으니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파호라는 몇 번인가의 거부 끝에 처음으로 조르딕 가에 방문했다. 이르미에게 교제하는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키쿄우가 거의 매일 같이 한 번 집에 데려오라며 성화를 부렸던 탓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침 파호라도 파드키아 공화국 근방에서 볼 일이 있던 참이라 방문하는 것까지도 일사천리였다.
"안뇽."
"이르미, 나 어디 이상한 데 없지?"
인사를 생략한 채 대뜸 질문부터 던져오는 그녀의 모습에 이르미는 무기질적인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소 초조한 듯한 기색의 파호라는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차림의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피가 묻거나 옷이 찢어지고 헤진 부분은 전혀 없었으므로, 이르미는 어렵지 않게 '이상한 곳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날 파호라가 남자친구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하기에 적절한 복장을 고민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는 사실을 이르미가 알 리 없었다. 파호라는 남자친구의 패션센스를 과신하지 않을 정도의 객관적인 시선을 갖춘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르미의 말은 적당히 필터링해서 들은 것이 다행이었다.
"여기가 시험의 문."
문 하나에 2톤이라든가 숫자가 커질 수록 두 배씩 무거워진다든가 하는 설명을 흘려들으며 커다란 문을 올려다보던 파호라가 한참만에 한 말은 한 마디 뿐이었다.
"이걸 내가 열라고?"
"? 응."
"………."
이르미에게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시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파호라가 그 시점에서 이르미와 결혼 점수를 2천점 정도 깎아버렸다는 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파호라는 이미 넨 능력자이기도 하고 헌터 시험장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에 속하는 유능한 헌터였다. 그녀의 마음속 점수와는 별개로 어렵지 않게 문을 열고 조르딕 가에 입성하기는 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본저택에 도착하는 것까지도 금방이었다.
"어머, 어서와요. 파호라=리타 양이지요? 이르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답니다."
며칠 전부터 내내 잔뜩 들뜬 기색이었던 키쿄우와 다른 가족들과도 무난하게 인사한 뒤 식사에 곁들인 대화에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고 이르미는 생각했다. 그 점이 파호라와 이르미의 결정적인 차이였다고 볼 수 있었다.
"헌터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죠?"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에요?"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초반 쯤의 질문까지는 파호라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이 정도는 물을 수도 있다고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물음은 점점 더 에스컬레이트 해갔다.
"우리 맏며느리가 되면 아이는 많이 낳아줘야 해요. 조르딕은 대대로 다산하는 가문이거든요."
"동생들이 많이 있는데 파호라 양이 맏며느리로서 잘 챙겨줄 수 있을까 모르겠네."
"호호, 우리 집에선 어릴 때부터 전기와 독 내성 훈련을 시키는데 파호라 양은 한 적 없죠? 우리 집에 들어오면 그것부터 해야겠네."
"어머, 혹시 이르미와 넨 계통 궁합도 잘 맞을까?"
대략 이런 수준까지. 전기 고문을 하겠다는 선포에 넨 계통까지 캐묻는 시월드라니 악명 높은 미즈전뇌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이다. 그 과정에서 파호라는 몇 번이나 이르미를 돌아보았지만 이르미는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밥을 맛있게도 처먹고 있었다.
"이르미."
"응."
"……."
그날 일정이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이르미는 뭐가 문제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파호라=리타는 그 날 이르미와 만남을 지속할지 여부를 재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난 도저히 너희 어머니 감당 못해."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이랬다.
"그렇다고 이르미 네가 고부관계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한숨이 섞인 파호라의 말에 이르미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 얼굴은 헌터시험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파호라의 취향에 딱 맞았지만, 그녀는 결혼이 얼굴만 뜯어먹고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즈전뇌에서도 넘겨봤는데 얼른 도망치라는 게 대세 의견이더라."
미즈전뇌에 올린 고민글에는 거의 6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리며 그 날의 전뇌톡에 선정 되었다. 베플은 죄다 '예비 시엄마 주책이네' '님 그런 남자랑 살면 진짜 도움 안 돼요' '조상신이 열일하고 계신다' 뭐 이런 것들 뿐이었다. 개중 주작이라고 단정하는 댓글에는 파호라가 손수 주작이었으면 좋겠다는 답글을 남겨주었다.
"미즈전뇌?"
"있어. 인생 선배들이 결혼이랑 시월드에 관해서 불평하고 조언해주는 전뇌 페이지."
파호라의 적당한 설명이 이르미에게 과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늘 결혼이나 시댁 식구에 대해 불평하는 사이트에서도 조르딕 가 식구들의 이야기는 핫토픽이었다. 다시 말해서 절대 결혼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헤어지자. 너희 어머니 감당할 수 있고 다산하는 여자 만나."
파호라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이르미는 자신의 어머니가 파호라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며 웨딩 드레스를 같이 고르러 가고 싶다고 기대했던 것을 떠올렸지만, 파호라는 이르미가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밥 잘 먹었어. 안녕, 이르미."
"파호라."
"미리 말해두겠는데 연락하지 마. 특히 새벽 두 시에 자냐고 문자 보내지 마라."
매정하게 말을 끊은 파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어떤 상황에건 임기응변이 가능한 일류 암살자 이르미의 두뇌로도 이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별 통보를 받는 것이 처음인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파호라는 인류 탑클래스의 단호박이었다.
그후로 이르미는 몇 번인가 파호라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문자며 전화에 전혀 답이 없었다. 파호라가 말한 대로 새벽에는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암살에는 스페셜리스트인 이르미였지만 헤어진 연인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있어서는 초보자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이르미가 할 수 있는 일은 때마다 파호라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 정도였다. 보통은 거절당한 시점에서 그런 짓을 하면 스토커라고 부르겠지만 이르미=조르딕은 조르딕 가의 장남이다. 범죄행위에 대한 감각이 한없이 비정상에 가깝다는 뜻이다. 사진 한 장에도 현상금이 붙어있는 남자에게 있어서 이 정도는 숨쉬기와 다름이 없는 행위였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천공격투장 근처에 간 모양이다. 그 날 파호라의 위치를 파악한 이르미는 최근 가장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주제로 관심을 돌렸다. 그 주제란 바로 시월드와 시집살이였다.
이르미가 태어났을 즈음엔 이미 키쿄우의 시어머니, 즉 이르미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므로 이르미가 시집살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여 년 전 드라마 같은 데에 나왔던 찬물에 빨래시키기, 말도 없이 손님을 데려와서 음식 만들게 시키기, 온갖 가사일에 트집 잡기 등등. 하지만 조르딕 가에서 가사노동은 전부 고용인이 하고 있다. 파호라도 그건 알고 있다고 했으니 그런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르미가 알고 있는 시집살이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에게는 좀 더 많은 레퍼런스가 필요했다.
처음으로 물은 대상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저택의 가사노동은 전부 고용인이 하잖느냐."
"메이드를 좀 더 고용하면 되겠지."
둘 다 수준이 이르미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 다음은 어머니였다. 시집살이가 어떤 거야? 하는 이르미의 물음에 키쿄우는 소리 높여 웃었다.
"어머, 파호라 양이 그런 걸 걱정하니? 절대 그런 일 없으니 안심하라고 전해주렴. 호호호. 언제 결혼할 거니? 얼른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마찬가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심지어 이미 헤어졌으니 안심하라고 전해줄 수도 없다. 이르미는 굳이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고 다음으로 대상을 바꾸었다.
그 다음은 동생인 미르키였다.
"시집살이? 흠, 글쎄 내 생각엔 15년 전의 명작 '마성의 며느리 야바이쨩' 시리즈에 나오는 내용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물론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집사 고트의 말은 이랬다.
"시월드 말씀이십니까? 키쿄우 마님께서 완전히 시집살이를 시키시지 않으실 거라는 믿음은 생기지 않지만 어쩌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 언젠가 우주가 도와서 우리 모두 함께 말을 타고 창조 시대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의미를 모르겠다.
결국 이르미는 자신의 주변 인적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방향의 정보원을 모색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시중에 나온 책들은 시집살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한 이르미가 드디어 떠올린 것은 파호라의 말이었다.
미즈전뇌.
그랬다. 파호라는 분명히 거기에서 시월드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고 했다. 거기까지 떠올린 이르미는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전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처음으로 접속해본 미즈전뇌에는 이르미로서는 처음 보는 신세계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남편이 헌터인데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어서 결혼을 한 건지 만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남편과 주말부부인데 시부모가 주말마다 불러내서 둘만 있을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 데 남편이 전혀 도움이 안 돼서 힘들다는 이야기 기타 등등. 수많은 이야기가 전뇌페이지에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리 넘겨보아도 이르미의 현재 상황과 같은 이야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남친네 집에 갔는데 초면에 다산하라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르미는 스스로 미즈전뇌에 글을 작성하기로 했다.
기억에 남아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적당히 내용을 적어넣고 등록시켰다. 그리고 전뇌페이지를 켜둔 채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암살 일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달린 댓글은 1000개였다. 전뇌를 그다지 즐겨쓰지 않는 이르미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0건이나 되는 정보라니, 어느 정도 허수를 제외하더라도 제법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이르미는 댓글을 클릭했다.
베플 1
이거 완전 싸패네 대체 뭐하는 집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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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
베플2
님 월에 천만 제니 벌어요? 여친이랑 따로 집 얻어 나와서 부모랑 연락 끊고 집안일도 안 시키고 완전 호강시켜줄 거 아니면 결혼 꿈도 꾸지 마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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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5
베플3
님네 엄마 완전 주책임ㅋ;;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결혼.....여자인생 망치지 말고 놔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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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이건 예상치 못했다.
이르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댓글들을 좀 더 읽어나갔다. 몇몇 광고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댓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결혼은 생각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왜지?
이르미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좀 더 고민에 빠졌다. 이르미=조르딕은 한 달을 열심히 일하면 수백억 제니를 벌 수도 있다. 천만 제니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일단 그 정보를 정정했다. 집안일은 애초에 전부 고용인이 한다. 그것도 정정했다. 그리고 집을 얻어서 나와 사는 것은…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쿠쿠르 마운틴이 어차피 전부 집이다.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차라리 경제적일 것이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정정하고 나니 댓글이 몇 개 더 추가되었다.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뭐하는 집안임?
굳이 숨길 것도 없다. 이르미는 거기에도 솔직하게 답변해주었다.
암살자인데. 조르딕.
그 뒤로는 놀랄 만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르미는 실시간으로 초마다 댓글이 수십개씩 삭제되는 전뇌의 기적을 보았다.
결국 미즈전뇌에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르미는 일전에 파호라에게 선물 받았던 손목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누웠다.
정말 시월드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파호라와 자신을 헤어지게 했는가? 어쩌면 이르미는 일평생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르미는 멀리 어렴풋이 동이 터오려는 하늘을 가만히 보다가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는 것을 깨닫고 집어들었다.
"?"
발신인은 요 며칠 이르미를 고민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인사도 하기 전에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귀를 찌를 듯이 쏟아졌다.
"이르미=조르딕! 너 대체 전뇌에 뭘 올렸길래 이 시간에 히소카가 낄낄거리면서 나한테 전화를 하게 만들어?!"
파호라의 목소리다. 파호라는 몇 마디를 더 떽떽거렸지만 이르미의 귀에는 그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듣고 있어?"
"아니."
"야!"
"파호라."
이르미는 파호라가 빽 소리를 지를 때의 얼굴을 떠올리며, 조용히 며칠 간 참았던 한 마디를 건넸다.
"보고 싶어."
파호라=리타는 며칠 전 자신이 이르미에게 이별을 고했던 그 레스토랑의 창가자리에 앉아있었다.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파호라는 이상할 정도로 한적한 레스토랑의 창밖으로 깜빡거리는 불빛을 멍하니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새벽, 다소 까다로웠던 일을 마치고 이르다고 해야 할지 늦다고 해야 할지 모를 시각에 귀가해 잠에 빠지려던 파호라를 방해한 것은 한통의 전화였다.
"아 이 시간에 어떤 미친놈이야…."
전화를 건 것은 히소카였으므로 파호라의 짜증은 의외의 방향에서 대단히 맞는 말이었다.
"여보세요?"
"파호라◆ 미즈전뇌 봤어?"
새벽 다섯시에 전화해 다짜고짜 묻기에 적절한 말은 아니었지만, 파호라에게는 히소카에게 상식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상식이 있었다. 파호라는 히소카의 전화 예절을 탓하는 대신 졸린 눈을 비비며 짜증을 냈다.
"이 시간에 그걸 왜 봐 또라이야…."
"후회하기 전에 얼른 보는 게 좋을걸♣ 이르미가 어지간히 초조했나본데♥"
구남친의 이름을 실은 히소카의 목소리는 잠결에도 확연히 느껴지는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이르미?"
뜻하지 않은 타이밍에 들은 구남친의 이름 때문에 잠이 확 깼다. 파호라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히소카와의 통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하고 컴퓨터를 켰다. 동시에 핸드폰의 메모리에서는 삭제했지만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르미의 홈코드로 전화를 걸었다.
이르미는 마침 자지 않고 있었는지 금세 전화를 받았다. 파호라는 인사를 할 생각도 없이 이르미에게 빽 소리부터 질렀다. 대체 뭐라고 썼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이르미가 썼다면 절대 변변한 내용일 리 없다. 심지어 그 히소카가 낄낄 웃으면서 전화를 했을 정도인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미친 내용일 것이 정해져있다. 슈뢰딩거가 울고 갈 가능성이었다.
전뇌 페이지가 로딩 되는 동안 파호라는 몇 마디 더 이르미에게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이르미는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듣고 있어?"
"아니."
"야!"
"파호라."
전화 너머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우스에서 손이 미끄러졌다.
이미 뻥 차버린 사이인데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정말 만나러 가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래서 파호라=리타는 웃기는 사람이 되었다.
"하아."
파호라는 자신의 웃김을 새삼 인정하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뭐가 어찌되었건 간에 파호라는 이르미를 정말 좋아하기는 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 시월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이르미가 가족에 관해서 좀 더 믿음직스러운 남편감이었더라면 결혼할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럴 리가….
"파호라."
생각에 잠겨있던 파호라는 어느샌가 도착한 이르미가 근처로 다가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르미. 어."
파호라는 어색하게도 말쑥한 정장차림인 이르미를 올려다보다가 주변이 어느새 로맨틱한 노래와 촛불로 밝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떨결에 불쑥 눈앞으로 들이밀어진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웬 꽃이야?"
파호라가 그렇게 묻는 것과 동시에 이르미가 벨벳으로 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파호라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제일 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결혼해줘."
"…………."
"시월드가 뭔지 알려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파호라는 결국 웃었다.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조금 컸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
"마성의 며느리 야바이쨩 1화에 나왔어."
"………뭘 보고 다니는 거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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