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건 -5
2. 회장님 강아지는 셀프 강아지(1)
후지사키 라이무는 법정에 서 있었다.
라이무의 사전 자료 수집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던 아카시 팬클럽 회장의 얼굴을 한 검사가 외쳤다.
"존경하옵고 사랑하며 동경해 마지않는 저의 태양 재판장님! 피고는 괘씸하게도 재판장님을 삼류 라이트노벨에 등장시켰습니다! 심지어 인기도 없습니다! 더 볼 것도 없이 사형! 사형입니다!"
지나친 팩트에 맞아서 이미 마음은 반쯤 사형 당한 라이무의 옆에서 변호사가 책상을 두드렸다.
"인기가 없는 건 상관없잖습니까! 사실이지만!"
변호사가 아니라 암살자였던가? 라이무는 의심을 담아 옆을 올려다보았다가 납득하고 말았다. 변호사의 얼굴이 라이무의 담당 편집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인기가 없는 후지이 무라사키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조금이라도 판매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튼 피고는 재판장님 본인에게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립 서비스겠죠!"
"책도 직접 구입했다고 했습니다!"
"증거품 수집입니다!"
하계 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열기를 띤 공방이 오간다. 친구들의 얼굴을 한 참관객들도 각자 무죄다! 사형이다! 하며 한 마디씩 말을 보태는 바람에 어딘가 학생회실을 닮은 법정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졌다. 라이무는 그 소란을 한 귀로 흘리며 짧고 인기 없던 삶을 반추했다.
소설이 이 정도로 화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사형을 당하더라도 여한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턱걸이여도 좋으니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주간 베스트에 올라보고 싶었다.
"정숙."
농구부 주장에 학생회장에 전교 수석에 이제는 재판장까지 겸하는 오버 스펙 동급생이 카리스마 있게 한마디 하자 법정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피고는 불경하게도 재판장을 모델로 인기 없는 라이트노벨 주인공을 쓰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형인가. 라이무는 점잖게 판결문을 읽는 아카시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재판장 본인이 피고를 사회적으로 사형시킬 사실을 몇 가지 알고 있는 바를 참작하여."
그렇다. 상대가 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니었다면 라이무는 이미 사회적으로 두 번 정도 죽었을 것이다.
"피고 후지사키 라이무를 무기-노예형에 처한다."
재판장 아카시가 엄숙하게 선언하며 법봉을 내리쳤다. 법봉에서는 왠지 핸드폰 알람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라이무는 잠에서 깨어났다.
"휴…꿈이었구나…."
꿈이라고 안심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대단히 현실과 닮은 꿈을 꾸고 일어난 아침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씻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어제 바리바리 챙겨온 음료수 중 하나를 마신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양쪽으로 돌돌 말아 잘 묶은 후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교과서와 숙제를 챙긴 것을 확인한 뒤 집을 나서려던 라이무는 중요한 것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잊어버릴 뻔했네."
각을 맞춰 꼼꼼히 포장한 꾸러미까지 완벽히 챙기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후에야 그녀는 정말로 학교로 향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언제나 성실한 소년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태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운동과 학업, 학생회, 교내외 활동 무엇 하나 소홀히 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혀를 내두르는 모든 분야의 탁월한 성취 이면에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이 늘 함께했던 것이다.
오늘도 그는 언제나 해왔던 대로 일찍 일어나 아침 연습을 마친 뒤에 등교길에 오른 참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운동부 아침 연습을 마치고 온 학생들이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거기에 동참하기 위해 신발장 문을 열었다.
"음."
신발장 안에는 실내화 외에도 낯선 꾸러미가 들어있었다. 등교했을 때 신발장 안이나 책상 위에 자리 잡은 발신인 불명의 편지나 선물과 마주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외관이다.
'전에 받은 것과 같은 포장지인데.'
기억에 따르면 후지사키 라이무가 자신의 입으로 '모델료 대신 몰래 신발장에 넣었다'고 실토했던 그 선물과 완전히 같은 포장지에 같은 리본이다. 덕분에 발신인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반대로 발신 의도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미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는 선물을 왜 굳이 신발장에 넣었으며, 예의 라이트노벨 건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선물을 보낸 것일까. 3권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사이즈로 보아선 책일 가능성도 없었다.
아카시는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그 자리에서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포장지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표지에 귀여운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영어 단어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선물로 주고받는 물건은 아닌 게 분명했다.
"…?"
더욱 정체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걸 포장까지 해서 넣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혹시 편지인가? 아카시는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단어장을 열어보았다.
물
빵
심부름
글씨
기타 등등. 각 장마다 아주 일상적인 단어가 하나씩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
아카시 세이쥬로는 단어장을 덮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약간 걸음을 빨리 해 도착한 교실에 찾던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후지사키 상."
"으헉!"
이름을 부르자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본다. 놀란 눈을 마주 보면서 손에 쥐고 있던 단어장을 내밀었다.
"이…물건에 관해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물건을 내려다본 라이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양손잡이라서 글씨를 아주 빠르게 쓸 수 있습니다. 서도 2급입니다. 캘리그라피도 배웠습니다."
대단하지만 그런 능력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아카시는 <글씨> 페이지가 펴져 있는 단어장을 닫으면서 다시 말을 골랐다.
"아니, 후지사키 상. 왜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야."
"물셔틀이든 빵셔틀이든…회장님이 편하게…부려 먹으시라고…?"
동그랗고 큰 눈은 커다란 마음의 창이나 마찬가지라서, 의도치 않더라도 눈치를 보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훤히 보이고 만다. 그 모습이 작은 동물을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정체 모를 몇 가지 비밀 이야기를 빌미로 뭔가 일을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뿐더러, 이런 종이 몇 장을 받는다고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편하게 부려먹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뜻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라이무의 눈이 다시 대지진을 일으켰다.
"호, 혹시 제가 빼먹은 커맨드라도…?"
"……."
아카시 세이쥬로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이해력이나 판단력 혹은 설득력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지사키 라이무는 그것을 뛰어넘는 영역에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