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쿠로바스: 첫사랑 프로비던스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첫사랑 프로비던스 -4

양철인간 2018. 7. 2. 02:39

4.



사토 미오가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미오는 그동안 나름대로 메이드 일에 익숙해졌다. 그녀가 하는 일이란 홀과 손님방 청소, 식전 준비와 뒷정리, 세탁과 세탁물 정리…기타 등등, 규모가 커진 가사노동의 연속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사를 도맡아 온 미오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익숙하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손님은 왕이라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거나 번호를 줄 때까지 가게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다짜고짜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는 둥 갖은 행패를 부리는 손님들에게 시달리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선배들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고용인 숙소의 방도 그녀가 혼자 살던 작은 아파트보다 나았으며…무엇보다도 걱정했던 이 집 도련님과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대화할 수도 있었다. 학업이며 후계자 수업으로 바빠 어지간하면 얼굴을 볼 수 없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오는 새 직장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후회했던 것도 조금쯤 희미해졌다. 다음 직장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일해야지. 미오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2층을 청소하기 위해 청소 도구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연회실과 2층 홀을 청소하고, 난간과 계단 손잡이를 닦고 바닥에 광을 내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게도, 문화재 수준으로 오래된 저택은 수시로 관리하는 손길을 필요로 했다. 하긴 그 덕분에 미오가 채용된 것이었으니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좋은 아침이야, 사토."


연회실은 최근엔 그다지 쓴 일이 없다고 하지만 늘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청소만 하면 된다. 가구도 별로 없어서 그다지 힘들 것도 없었다. 바닥의 카펫 청소를 끝내고 홀로 돌아온 미오에게 인사를 건넨 건 마침 방에서 나오던 도련님이었다.


"아카, 아."


오늘은 휴일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2층 청소를 하는 시각이면 그는 늘 집을 비웠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 마주치는 건 처음이다. 미오는 무심코 이름을 부를 뻔했던 것을 간신히 수습했다.


"도련님."


그렇게 부르자 그는 대답하는 대신 지금 둘 뿐인데, 하고 짧게 덧붙였다. 미오는 입을 뻐끔거리며 주위와 계단 아래까지 둘러보곤 한숨처럼 소리를 죽여 이름을 불렀다.


"…아카시 군."

"응."


그는 그제야 대답하면서 웃었다. 


"부탁할 게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

"아, 응."


미오는 지난 일주일간 집사님과 오오하라 씨가 몇 번이나 다른 어떤 집안일보다도 주인어른과 도련님의 말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을 부탁할지는 몰라도 얼른 해결한 후에 아직 못한 홀 청소를 마치면 될 것이다.


"그럼 잠시 티 타임 상대를 해줄래?"

"어…."


차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말을 어렵게 한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야."


자신의 방문을 가리키는 손길이 청소도구를 내려놓고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던 미오를 붙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미오를 보고 그가 다시 웃었다.


"다른 건 다 준비되어 있는데, 같이 차를 마셔줄 사람이 없어서."

"……."


그런 이야기일 줄은 몰랐다. 이런 것도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부탁에 속하는 걸까? 그녀는 아직 다 치우지 못한 홀을 돌아보며 소심한 저항을 시도했다.


"청소…해야 하는데…."

"내가 부탁한 일이 있다고 말해 둘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다.


"안 돼?"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미소 짓는 섬세한 얼굴 위에서 하얗게 빛났다. 눈을 굴리던 미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며칠 만에 다시 방문한 방은 여전히 깔끔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이 방과 주인어른의 침실까지는 아직 미오가 맡고 있지 않으니 오오하라 씨나 쇼우지 씨가 관리를 맡고 있을 것이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 같은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중학교 이후로 한 번도 남에게 청소를 맡겨본 일이 없는 미오에게는 신기하기까지 한 궁금증이었다.


"자, 여기."

"고마워."


쇼파에 앉은 미오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그녀를 굳이 앉혀놓고선 직접 차를 내어온 도련님이 맞은 편에 앉았다.


"일은 좀 익숙해졌어? 힘들진 않고?"

"아직 더 배워야겠지만…할 만해."

"야요이 씨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던데. 일이 힘들 텐데도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말이야. 성실한 것도 좋지만 쉬엄쉬엄 해."


야요이라면 분명히 첫 날에 들은 오오하라 씨의 아래 이름이다. 평소에도 친절하고 엄격한 선배이긴 했지만 그런 칭찬까지 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꽤 기분이 좋았다.


"일을 잘한다고는 안 하셔?"

"글쎄, 곧 자리를 위협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는 했어."


장난스러운 말을 차분하게도 한다. 미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힘내서 얼른 도전해야겠는걸."

"야요이 씨에게도 전해둘게. 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토가 내 방까지 맡게 되겠는데. 괜찮겠어?"

"나는 상관없지만, 나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키면 어떡하려고? 잘 숨겨둬."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쳤지만, 아카시는 잠깐 놀란 얼굴을 한 채 말이 없었다. 왜 그러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한숨처럼 말했다. 대단히 곤란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야 나도 성인이고 남자니까 완전히 흥미가 없다고 말할 순 없지만…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걸."

"…응?"


어쩐지 묘한 뉘앙스로 들릴 수도 있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미오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정말인데. 이거 성희롱인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해봤자 곱게 들릴 리는 없는 것 같다. 정말 아닌데.


"아니, 아니! 그, 그런 뜻이 아니라…일기, 일기장이라든가!"


급한 마음에 변명처럼 들리는 해명을 하며 얼른 손을 내저었지만 아카시는 여전히 곤란한 듯이 시선을 돌린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울상이 되었다.


이걸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분 나빴겠지.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생각한 참인데 이게 뭐람. 정말로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


결국 미오는 시무룩하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런 걸로 용서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시선을 찻잔으로 떨어트린 채 실수를 자책하던 미오의 귀에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미오가 본 것은 아까의 포즈 그대로 어깨를 떨면서 웃고 있는 아카시의 모습이었다.


"……."


잠깐만. 이게 뭐야. 설마….


"…놀린 거지?!"


비명처럼 외치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곤란한 기색은 온 데 간 데도 없이 재미있어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 미안…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사토."


그렇게 고민했는데 놀린 거였다니. 미오는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를 배신감에 입만 뻐끔거렸다. 그 표정을 보고 아카시는 다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오에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본인도 중학교 때와 웃는 얼굴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조차도 복합적으로 배신당한 기분에 한 몫을 하고 만다. 미오는 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정말 뭐야!"

"조금 당황했던 건 사실이지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언제적 얘길 하는 거야."

"언제적이라고 하기엔 반응이 똑같은데."


미오는 화를 내야 할지 그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할지 모를 복잡한 심경이 되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총체적으로 혼잡하게 억울했다. 노려본 얼굴이 여전히 눈부시게 미소 짓고 있는 것까지 억울했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아카시는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뻗어 티푸드가 담긴 접시를 미오 쪽으로 밀었다. 이런 걸로 달래진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것까지도 장난인 건지 모르겠다. 미오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어쨌든 오해할 만한 말을 한 건 자신이었으니 더이상 불평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장난에 당하고 보니 완전히 억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안 놀랐어요, 도련님."


결국 미오가 선택한 건 작은 반항이었다.


"화났어?"

"아니요, 도련님."


그가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난 게 아니라면 그렇게 부르는 거 그만둬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가 어째서 장난을 치는 건지 조금쯤 이해할 것도 같았다. 미오는 그쯤에서 도련님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럼 도련님보다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쪽이 나아?"


마지막 한 방은 빼먹을 수 없었지만.


"……."


아카시는 잠시 그녀의 카운터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의기양양하게 웃는 미오를 보고 덩달아 웃고 말았다.


"이건 예상외였네."

"내 기분을 조금 알겠어?"

"확실히. 앞으로는 자제할게. 그러니까 사토도 그만 그 호칭은 포기해줄래?"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다. 미오는 이제 정말로 도련님을 그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관대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에는 다시 평범한 대화로 돌아왔다. 오래 된 저택의 역사나 손님이 올 때면 삐걱거리는 바닥, 잘 쓰지 않는 귀빈실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이 찻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미오가 잘 마셨어, 하고 인사를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거야? 아쉬운걸."

"청소 마저 해야지. 이거 치울까?"

"나중에 내가 할게. 성실한 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아카시가 자연스럽게 미오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뻗기 전에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

"천만에. 참, 쉬엄쉬엄하라는 건 진심이야. 나를 구실로 써도 좋으니까."


고용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한껏 다정하게 내려다보는 눈길이 진심인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미오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끔 도련님 찬스를 쓸게."


가까이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이번에야말로 청소를 끝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미오의 등 뒤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너에게라면 그다지 숨기고 싶은 건 없어."


미오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영광이야."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길 바랐다. 다시 돌아보기 전에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옛날의 어느 날처럼, 또다시 착각해버리고야 말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