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쿠로코의 농구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절대적 예외 상황 上

양철인간 2018. 6. 27. 02:09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보쿠시) 드림




절대적 예외 상황 上




당황이란 패배와 더불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몇 가지 단어들 중 하나였다. 


놀랄 만큼 머리가 좋은 그에게 있어 몇 수 앞의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꼭 자신의 특수한 눈을 쓰지 않더라도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눈을 이용하게 되면 미래를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되므로, 그는 언제나 예상의 범위 안에서 세상을 접했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예상 밖의 일'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까지는.


정확히 말해, 같은 농구부 2학년 하야마 코타로의 신발장에 작은 선물 꾸러미를 넣는 같은 반의 여자아이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하야마가 몇 번인가 익명의 누군가에게 선물이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은 이미 농구부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야마를 좋아하는 취향 이상한 여학생은 대체 누구인지 1군 뿐만 아니라 2군들도 제법 시끄럽게 술렁거렸었다. 아무튼 이 나이대의 남학생들이란 남의 연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존재인 것이다. 


아카시는 하야마 코타로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소식을 듣고도 남들처럼 그 소식에 흥미를 불태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상대가 자신이 아는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물며 그것도 눈앞의 여자아이일 것이라고는.


같은 반, 옆자리, 부반장, 신문부, 전교 2등.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은 이런 단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하야마 코타로를 열렬히 좋아하는 익명의 누군가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묘하게 매사에 냉정 해보이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던 탓일 수도 있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불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인가. 혹은 같은 반의 여자애들 중 아카시에게 말을 걸 때 가장 동요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아카시 세이쥬로가 예상한 범위 안에 그녀는 없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


아카시는 드물게 놀란 얼굴이 된 자신을 느꼈다. 금방 표정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상대도 이미 확인하고 말았을 것이다.


"…봤어?"


그렇게 물어온 것을 보면 분명했다.


"일단은."


그렇게 대답하자 여자아이는 하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아카시에게 달려왔다. 이제껏 쿨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몇 번이나 둘러본 후 불쑥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서 체온이 느껴질 것 같았다.


"비, 비밀이다? 알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몇 번이나 말을 더듬으며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쉿, 하고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다른 누구에게 말할 생각은 없어. 프라이버시니까."


그렇게 말하자 상대의 얼굴에는 눈에 띄게 안도가 번졌다. 당황하면 꽤나 속내가 투명하게 보이는 얼굴이 되는 모양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평소와의 갭을 생각하면 어쩐지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흠흠. 그럼 됐어."


하얀 얼굴은 몇 초 만에 다시 평소대로 새침한 표정을 되찾았지만, 붉은 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농구부 연습하러 가는 거야?"

"맞아."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걸어오는 여자애가 신기했다.


"…왜 이제야 가는 거야? 농구부는 분명히 다 체육관에 모였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학생회 회의 날도 아니고."

"학생회에 급한 일이 있었어."


조사 부족이었네. 중얼거리는 옆얼굴이 진지하다. 아카시는 그 한마디에서 그녀가 그동안 농구부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째서일까. 한 번도 누군가를 몰래 좋아해본 적이 없는 아카시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짝사랑 자체도 패배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고백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선물이며 편지 따위를 가져다 바치는 일은 도대체 어떤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양식인지 도무지 속내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사실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그 심리를 이해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코타로를 좋아해?"


그렇게 물은 것은 심술 궂은 충동에 가까웠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는 약자에게는 횡포를 부리지 않는 너그러운 승리자다. 남들의 위에 서는 사람이란 그런 존재여야 하는 법이다. 이런 충동 자체도 제법 생소한 것이었다. 말하고 나서야 이상을 눈치챘지만, 자신의 행동을 다시 돌아볼 새도 없이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반쯤 뛰어올랐다.


"그!!!"


가까스로 제 색을 찾아가던 얼굴이 삽시간에 다시 달아올랐다. 펑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아카시는 그 얼굴이 보기에 제법 재미있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 그, 그것은, 그, 저기……아이고오늘저녁이불고기라는걸잊을뻔했네! 잘 가!"


한참 말을 더듬던 여자아이는 중앙 현관을 나서자마자 속사포처럼 어색한 말을 늘어놓고는 그대로 도망쳤다.


"………."


단정하게 교복을 챙겨 입은 등이 멀어져 간다.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지만 따라잡으려면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카시는 잠시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 유치한 유쾌함이 꽤 오래 남았다.






교내 신문부가 예정대로 인터뷰를 위해 농구부를 찾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방과 후였다.


그동안 아카시는 묘하게 자신을 피해다니는 여자아이가 영 마음에 걸리는 며칠을 보냈다. 같은 반에 옆자리인 것 외에는 그다지 접점조차 없는 타인이었지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을 보면 천하의 아카시 세이쥬로라도 어쩐지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된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아카시는 코치와 함께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는 신문부원 몇 명 사이에 섞인 익숙한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뻣뻣하게 굳은 어깨가 눈에 걸렸다. 쭈뼛거리며 아카시를 피해다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닌 척 체육관 안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향한 곳은….


과연.


그 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역시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되었다.


"코타로. 이쪽으로 와. 인터뷰가 있으니까."


하야마와 함께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띄게 표정이 환해진다. 저래서는 숨기는 것도 무리 아닐까. 아카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신문부 부원들의 앞에 섰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여자아이의 시선은 하야마에게 고정된 채였다.


아카시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신문부 부장의 인터뷰에 응했다. 오고 간 질문은 형식적이었다. 올해의 목표, 포부, 농구부 활동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교내 신문의 특성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가벼운 질문 하나 드릴게요. 이상형은?"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질문이다. 신이 난 하야마가 가장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애!"


그 말을 듣고 어쩐지 고뇌하는 얼굴이 된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필사적으로 조건에 맞는지 생각해보는 모양이었다. 역시 지나치게 알기 쉽다. 그다지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다른 분들은요? 아카시 군부터 말씀해주시겠어요?"


다른 신문부원이 던진 질문이 여자아이를 관찰하던 그의 주의를 다시 인터뷰로 돌렸다. 제각기 돌아오는 대답을 열심히 받아적는 신문부원들 옆에서 그녀는 여전히 하야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말할 때 이렇게까지 남에게 집중하는 사람을 보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생소한 일이었다.


"인터뷰를 핑계로 사심을 해결하려고 하면 곤란해."


어쩐지 답지 않게 짓궂은 말을 작게 속삭였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지도 몰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한 행위의 동기를 돌아보는 것조차 신기한 일이었지만…


"아, 아, 아니, 아니거든!"


얼른 주위를 둘러보면서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하는 여자아이를 보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유쾌했던 것이, 그 무엇보다도 이상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