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전설을 염가 판매합니다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 드림
*키스데이 기념 연성
*12시 지났지만 내가 아직 안 자고 있으니까 아직 키스데이임
전설을 염가 판매합니다
보통 학교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과학실의 인체 모형이나 미술실의 석고상과 관련된 7대 불가사의라든가, 학교 터가 원래는 처형장이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유래라든가, 아무도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학교 창립자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찾아라! 모든 보물을 학교에 남겨두고 왔으니! 라고 말했다는 전설이라든가….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고스트 버스터즈가 인기 없는 남자를 응징하고 세상을 구하는 21세기. 점쟁이도 가뭄이나 홍수는 일기 예보에게 맡기고 연애운을 더 자주 봐주는 시대. 그리고 학교에 모여 있는 것은 밥보다 연애가 중요한 사춘기 학생들임을 고려하면, 사실 유령이나 보물 따위보다 인기 있는 전설은 따로 있다는 게 당연한 결론이 된다.
다시 말해,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학교 전설은 7번째 불가사의를 알면 죽게 된다는 케케묵은 오컬트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순정 만화식 로맨스 전설이라는 이야기다.
일설에 따르면 우리 학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키스 데이에 교정의 가장 오래 된 나무 그림자를 밟고 키스하면 영원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고 짝사랑 하는 사람에게 키스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고전적인지 현대적인지 알 수 없는 무안단물 같은 내용이다. 키스 데이라는 얄팍한 이벤트 데이의 유래에 대한 유력한 최신 학설을 파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대한 길게 쳐줘도 30년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나무뿌리에 있는 큐알 코드를 찍으면 궁합을 알려준다고 하는 쪽이 덜 염가로 보일 것 같다. 오래 산 나무 어르신은 무슨 죄가 있길래 6월 14일만 되면 온종일 근처에서 입술을 비비는 사춘기 남녀를 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선배는 정말 부정적이네요. 특별히 나쁜 추억이라도 있으세요?"
그렇게 주절주절 불평을 늘어놓자 옆에 앉아있던 학생회장이 웃는 얼굴로 나에게 딜을 넣었다. 건방지게도 1학년 때부터 학생회장에 농구부 주장 타이틀을 달고 모든 역할을 빈틈 없이 수행해온 천재 소년 아카시 세이쥬로 군은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시비를 걸 때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하루 종일 투덜댄 것 같네."
물론 그게 맞긴 하다. 학생회실에 오고부터 거의 내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꾸 투덜거리게 되는 건 딱히 나쁜 추억이 있어서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어쩔 수 없는 일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잘 보이잖아…."
예의 사랑의 전설을 품은 로맨틱 할아버지 나무는 학생회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각이면 그림자는 학생회실 쪽으로 자꾸만 길어진다. 창문 안쪽은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으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게 되어있다.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려는 연인들이 그림자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키스하는 장면이 필히 창문으로 보이고 만다는 뜻이다.
"대체 내가 왜 남들이 입술 부비는 걸 이렇게 많이 봐야 하는 거야…."
순정만화에서도 로맨스 영화에서도 키스신을 제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키스하는 커플의 사생활을 하루 종일 감상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 학교니까 키스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그 다음 진도는 다른 곳에서 나가줬으면 한다. 헛기침을 하면서 창문을 두드린 게 오늘로 몇 번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화들짝 놀라면서 도망가는 커플들 얼굴을 기억해버려서 나중에 길 가다 인사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서로 민망하잖아. 그나마 이제 할 일은 다 끝나서 집에 가면 되니까 다행이지.
"아카시 군은 아무렇지도 않니?"
워낙에 뭐든 잘해서 모든 일에 초연해 보이긴 했는데 이런 일에까지 아무렇지 않을 줄은 몰랐다. 작년에도 아카시는 회장이었지만 6월 14일에 학생회실에서 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 이런 게 보일 줄은 몰랐을 텐데. 갑자기 학생회 사람이 두 명이나 전학을 가는 바람에 나와 아카시만 바빠진 게 문제였다. 하긴 나보다도 아카시는 이 일이 끝나도 농구부 일이 있으니까 더 바쁘겠네. 얼른 보내줘야지.
"다들 즐거워 보이니까요."
불을 끄면서 돌아보자 아카시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 얼른 가기나 하자꾸나."
이 애는 혹시 안드로이드인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플레이해보지 않았음)? 어쩐지 성능이 인간이 아니다 했어.
"그보다 선배, 제 질문에 아직 답을 안 주셨어요."
창문을 등지고 서서 역광을 받은 관자놀이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으려니 안드로이드(의심) 회장이 다시 물음을 던져왔다.
"어떤 거?"
"이 날에 나쁜 추억이라도 있으시냐는 거."
"음? 딱히 없는데. 아, 1학년 때 사귀었던 남친이랑 1학기 끝나기도 전에 헤어진 것 정도?"
그때는 나도 첫 연애였고 어렸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자친구와 미심쩍은 전설 이벤트를 챙겼다. 결국 현실은 순정만화와 달라서, 학교가 다 떠들썩하도록 싸운 후에 헤어지는 배드 엔딩을 맞았지만. 영원한 사랑이라더니 헤어지면 적어도 다른 상대를 준비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A/S도 안 해주는 불량 서비스 전설 덕분에 나만 오늘 내내 고통 받고 있다. 어차피 오늘 키스한 애들도 내일 헤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전설은 나만 힘들게 해놓고 아무 책임도 안 질 것이다.
가방을 집어들면서 떠벌떠벌 2년 전 이야기를 늘어놓자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로이드가 알긴 뭘 안다고.
"다행이네요."
"뭐가? 내가 헤어진 게?"
조금이라도 당황시키고 싶어서 심술궂게 반문하자,
"네."
아카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거 인성 봐라…."
작년보다 덜 건방져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큰 착각이었나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저에게는 다행이죠."
입을 뻐끔거리면서 손가락질만 하는 나에게 아카시가 다시 자기 인성을 확인시켰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기분이 이런 건가. 그야 아카시를 키운 적은 없지만.
"선배가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으면,"
아카시가 나에게 한발 다가오면서 덧붙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나무 그림자가 그의 등 뒤로 망토처럼 드리워진다. 한 톤 어두워진 실내에서 아카시의 눈만이 빛나며 시선을 붙들었다.
"…선배에게 키스할 수 없잖아요."
언제 봐도 참 잘생기긴 했다…고 생각하다가, 다가온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서야 말 뜻을 이해했다.
"…응? 어?"
귓가에 닿은 엄지가 부드럽게 귀 옆의 피부를 쓸었다.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의 솜털이 일제히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움찔 떨리는 어깨를 간신히 제자리로 돌려놓으면서 슬쩍 시선을 피해 눈을 떨어트렸다.
어느새인가 창문을 넘어 기어들어온 나무 그림자가 내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전설을 다시 확인해보자는 핑계를 대고 싶은데, 안 될까요?"
설탕을 잔뜩 넣은 생크림 같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올라선 솜털들을 간지럽혔다.
다시 한 번 발끝에 걸쳐진 그림자를 확인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가지는 확실했다.
아카시는 내 생각보다 더 키스를 잘했고,
우리 집 분재보다도 수명이 짧은 염가 판매 전설은…내 생각보다는 훨씬, 훨씬 더 유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