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비의도성 차도살인지계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 드림
*1년만에 돌아왔지만 오늘도 아카시가 없는 아카시 드림 시리즈3
*아직도 라겜 조금 전 시점
비의도성 차도살인지계
아무래도 농구를 하는 애들은 인생을 농구에 저당 잡힌 상태를 즐기는 모양이다. 전부 도M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선 고등학교에서 농구부, 대학교에서도 농구부,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끼리 모여 스트릿 농구 대회 연습을 또 하진 못할 거다.
숨 쉬는 모든 시간을 농구에 쓰는 애들이다. 이렇게 해서 잠은 언제 자고 과제는 언제 하는 거지? 이마요시에게 물어봤더니 어떻게든 하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점이 잘 나올지는 별개 문제지만, 아무튼 미제출로 버티는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애들도 다들 사정은 비슷한 모양이다. 대학까지 와서 대체 무슨 셀프 고문인지 모르겠다. 하루라도 농구를 안 하면 몸에 가시 같은 게 돋는 건가?
오늘도 그랬다. 농구 바보들은 몇 안 되는 농구부 연습 오프날이 되자마자 모여서 재버워크와의 일전에 대비해 연습하고 있었다. 딱히 대학 농구부에 소속되지 않은 나도 휴일은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칼같이 모여서 연습하는 걸 보면 대단한 열정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게다가 이제 여름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만히 앉아서 기록하기만 해도 더워서 시원한 곳으로 대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희 정말 농구 변태들이구나…."
죽을 것 같이 숨을 몰아쉬면서도 어쨌든 오늘치 연습을 끝냈다. 독한 놈들. 기록을 정리하면서 혀를 내두르자 이마요시가 스포츠 타올로 얼굴을 닦으며 돌아보았다.
"변태라니 너무하네."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도 역시 농구에 미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히무로 군이나 키세 료타 같은 애가 땀을 흘렸으면 뭔가 스포츠 웨어 광고 같은 걸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이마요시는 특정한 어느 층에 수요가 있을 타입이긴 해도 미남이라고 하긴 미묘하니 어쩔 수 없다.
"아님 농구에 영혼을 팔았든가."
"딱히 그렇진 않은데."
뒤이어 히구치가 말을 받았다. 미야지와 오카무라도 다가오면서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라든가 뭐 그런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하는 거지만 땀 냄새가 나니까 너무 가까이 오진 말았으면 한다.
"아냐, 너넨 죄다 농구 악마랑 계약한 게 틀림없어. 고등학교에서도 내내 농구 해놓고 또 농구부에 들어간 것부터 이미 증명됐잖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러나면서 덧붙였지만 눈치 빠른 이마요시는 다 알겠다는 듯이 여우처럼 샐쭉 웃었다. 조용히 하라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연습한 애들한테 땀 냄새가 난다고 타박할 순 없다. 고등학교 때도 이보다 열 배는 있었지만 열심히 참았다. 다행히 이마요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스포츠 드링크를 들고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야 뭐…."
"쭉 농구를 했으니까…."
그리고 달리 눈치가 없는 농구 바보들이 한 마디씩 농구 신앙을 뒷받침하는 말을 덧붙였다. 쭉 농구를 했으니 이제 질릴 때도 된 거 아니냐는 뜻인데 전혀 못 알아들었나보다. 뭐 얘들한테 농구 없는 인생도 있다고 알려주는 건 침팬지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을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그러고 보니, 니는 농구부 안 들어오나?"
이마요시가 그렇게 물으면서 저번에 체육관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교토 근방에서 온 농구부 동기가 내 얼굴을 알아보더란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야 3년 내내 매니저였으니 여기저기 농구부에 아는 사람이야 많은 게 당연하긴 했다. 막상 그쪽의 이름을 들어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지. 주요 선수라면 기억하겠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난 고등학교 3년 내내 매니저 한 걸로 충분해. 너희만큼 농구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더 했다간 지겨워질걸. 애초에 고등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매니저 같은 거 할 생각 없었단 말이야."
그 외에는 정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농구부에 들어갔던 것도 딱히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하긴 나야 선수로 복귀하고 싶었던 거지만…그러고 보니, 넌 매니저는 어쩌다 시작한 거야?"
히구치가 훌러덩 상의를 갈아입으면서 물었다. 다른 애들도 각자 옷을 갈아입고 있어서 맨살이 과포화 상태였지만 고등학교 3년간 너무 익숙해진 광경이라 별로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큰일일 정도다. 여전히 내외를 하는 카사마츠만 저 멀리에서 갈아입고 왔다.
"나? 말 한 적 없나?"
"응. 고등학교 들어와서 처음 시작했다는 것만 들었는데."
그랬던가. 딱히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지만 숨길 일도 아니었는데. 농구부 사람 중에 누구한테 얘기했더라….
"아, 미부치한테 말했었구나."
"넌 은근히 미부치랑 사이 좋더라…."
"농구부에서 그나마 제일 말 통했단 말이야. 농구 말고 다른 얘기라도 할 줄 아는 애는 걔밖에 없잖아."
"음. 매도당하는 기분인데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서 왜였는데?"
아까 사 마셨던 콜라캔을 구기면서 말을 이었다. 히구치가 캔을 받아가서 대신 쓰레기통에 던져넣어주었다.
"뭐 딱히 이유라고 할 것도 없는데…처음에 입부 권유를 받은 날 본 선배가 엄청 내 취향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입부 신청서를 쓰고 보니까 농구부였던 게 전부거든."
사정을 털어놓자 반응한 건 히구치만이 아니었다. 짐을 챙기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던 덩치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보는 광경이 제법 장관이라고 할만했다. 듣고 있는 건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반응하니까 왠지 기분이 좀 이상하네.
"니들 진짜 나한테 관심 많구나."
그렇게 말하자 오카무라가 고릴라 아이즈를 껌뻑이면서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 신기해서…그런 일이 진짜로 있다니."
"너희 학교도 히무로 군이 나서서 입부 권유를 했으면 여러 명 있었을걸."
그렇게 말하자 오카무라는 다시 어째서어어와 비슷한 고릴라 소리를 냈다. 당연히 무시했다.
"그런 이유로 매니저 하는 아는 순정만화에나 나오는 줄 알았데이."
"그런 이유만으로 하기엔 너무 힘들긴 하지. 쓸데없이 시작해서 손해 봤어."
"지금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그래서 그게 누구였는데?"
우리가 1학년일 때 있었던 잘생긴 선배라고 해봤자 한두 명 뿐인데 뭘 새삼스럽게 전혀 모르는 것처럼 묻는 거지.
"타카기."
"아. 부주장이었던? 그 선배 인기 많았지."
"응, 걔. 다른 거야 어쨌든 얼굴은 괜찮았잖아."
"그러고 보니 약간 히무로 군 닮았나?"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히무로 군이 더 잘생겼지만."
"너 걔 얼굴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 얘기 이백 번 쯤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때는 꽃 피는 4월.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멋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얼굴과 피지컬만은 내 취향이었던 미남이 웃으면서 나에게 '농구,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본인이 아카기 하루코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 얼굴에 정신이 팔렸던 나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홀린 듯이 입부 신청서를 받아서 이름과 학년반을 적어넣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손해 보는 짓이었지만, 감독님이 한 달만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에 정말 한 달 동안 매니저로 일했다.
"그러고 나니까 한 달이나 한 게 왠지 억울해져서 적어도 걔를 꼬시고 나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사쿠라기 하나미치도 결국 척추가 나갔는데 내가 뭐라고 계속 붙어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 취향이고 나발이고 한 달 지나고 그만두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랬단 말이지…."
히구치가 어쩐지 배신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이거 내가 나쁜 사람인 상황이야? 아니 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그거 하나만 보고 들어와서 3년 내내 매니저 일을 해줬다는 것에 감동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왜. 뭐."
"아니야…."
그랬구나…하고 계속 오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히구치 대신 오카무라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럼 그걸 못 이뤘으니까 매니저를 계속한 거야?"
"뭔 소리야. 그건 별개로 그냥 정들어서 그런 거고."
그때까지만 해도 농구는 커녕 운동부에 대해서조차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계속 부대끼며 일하다 보니 의외로 재밌고 착한 애들이라 금세 친해졌다. 같이 매니저를 했던 여자 선배도 착해서 도무지 혼자 쏙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사귄 걸 기준으로 두자면 딱히 못 이룬 것도 아니거든."
내 말에 히구치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3초 뒤에 입을 벌렸다. 깜짝 놀란 목소리가 나온 건 또 그로부터 3초 뒤였다.
"……뭐!! 전혀 몰랐는데?! 사귀었어? 진짜? 언제?"
"그야 비밀이었으니까. 1학년 때 윈터컵 조금 전부터 사귀어서 걔 졸업하고 헤어졌어."
"전혀…몰랐는데…."
"다들 몰랐으니까 삐치지 마. 그때 매니저였던 카가와 선배랑…전에 미부치한테 밖에 얘기 안 했거든. 어차피 별로 오래 만난 것도 아니었고."
"그랬단 말이지……."
그리고 그 자식이랑 비밀까지 만들어가면서 사귀었던 게 내 흑역사가 됐다. 지금도 생각하면 짜증부터 난다.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어차피 미성년자였는데 빨간줄이 뭐 별거라고 안 죽이고 참았담.
"농구부까지 들어가면서 사귀어놓고 왜 그렇게 금방 헤어졌냐?"
미야지가 그렇게 물어오는 바람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남녀가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이유야 보통 여러 가지가 있지만…이 경우엔 귀책사유가 명백했다. 너무 명백해서 말하기도 좀 꺼려질 정도다. 미부치한테도 여기까진 이야기 안 했는데…. 뭐,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숨길 일까지도 아니긴 하지.
"음…걔가 양다리 걸쳐서."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겨울이었다. 부실에 두는 상비약이 떨어져서 잠시 숨도 돌릴 겸 사러 나갔다가, 그 자식이 다른 학교 여학생과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걸 봤다. 그 전에도 다른 남자애들이랑 시간 보내는 게 싫으니 농구부 매니저를 그만두라는 둥 남자 연락처는 다 지우라는 둥 영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지껄여대서 삐걱거리고 있긴 했지만 그런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생각보다 충격이었다. 그 날 훌쩍훌쩍 울면서 돌아온 나를 감독님이 일찍 집에 보내주셨다. 덕분에 집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날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었다. 감독님…가끔 월급루팡처럼 보여서 그렇지 좋은 분이었어…다음에 한 번 찾아뵈어야지….
감독님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고 있는 사이, 짐 챙기는 것도 잊은 채 서 있던 녀석들이 그 당시의 나보다도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엔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카사마츠까지 놀란 눈이 돼서 날 보고 있었다.
"아니 잠깐, 그 인간 작년에도 OB랍시고 슬쩍 얼굴 내밀고 가지 않았어?!"
"안 그래도 와서 말 걸려고 하길래 간신히 피했잖아."
"뻔뻔한 거 보게!"
"키무라네 경트럭으로 쳐죽여버리자!"
키무라네 경트럭은 무슨 죄니.
"요즘도 가끔 연락 와. 전부 무시하긴 하지만. 번호도 바꾸고 메일도 여러 번 바꿨는데 누가 자꾸 알려주는 건지."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이 있다니…!"
컬쳐쇼크를 받은 오카무라가 씩씩대며 가슴을 두드렸다. 전투 준비를 하는 고릴라 같으니까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잘 헤어졌구마."
"그냥 메일로 통보한 거였지만."
"얼굴이라도 한 대 갈겨주지."
"그럴 걸 그랬나. 뭐, 옛날 일이고 이제 와서."
인터넷에서 본 사이다 같은 복수를 하기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았다. 걘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자기중심적인데다가 욱하는 성질도 있었다. 게다가 부활동 끝나는 시간에 우리 집 주소까지 알았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나서도 집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어서 더 무서웠다.
"구워버렸어야지."
"응, 나중에 필리핀에 가서 살인청부라도 넣지 뭐. 별로 안 비싸다던데."
"그거 자세히 알아봐주까."
"네가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려, 이마요시…."
이마요시는 대답 없이 씩 웃기만 했다. 진짜냐.
"필리핀에 아는 사람 있다."
진짜냐고.
"이건 농담이데이."
"음."
"진짜 알아봐 줄 순 있는데."
"알아내면 연락해."
나도 이건 농담이다. 아마도.
그 날은 구남친 뒷담을 몇 가지 더 하다가, 전원의 연애경험을 합쳐도 한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을 녀석들이라도 내 편을 들어준 것을 위안 삼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이렇게 사족을 붙이는 건 물론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며칠 뒤, 혼자 느긋하게 쇼핑을 마치고 돌아와 개운하게 목욕까지 끝내고 난 저녁이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들었다가 연락이 쌓인 것을 발견했다. 주로 미부치와 히구치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심지어 히구치가 보낸 제일 최근 메시지는 정말 미안하다는 내용이었으니 불길한 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우선 히구치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많이 올라갈 것도 없이, 미부치가 왜 헤어졌는지도 아는 줄 알았다는 한 줄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대충 봤지만 타카기가 계속 내 연락처를 알아내서 질척거린다는 이야기가 신경 쓰였던 히구치가 나름대로 그걸 어떻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남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설명 없이 뭔가 알아내기엔 히구치는 딱히 요령이 좋은 녀석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미부치와 이야기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미부치도 헤어진 이유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끙."
미부치에게서 괜찮냐는 메시지가 쏟아진 건 바로 그런 이유였다.
망했다. 완전 망했다.
그야 약간 찌질한 연애 한 번 했던 게 일생일대의 비밀은 아니다. 물론 그게 내 잘못인 것도 아니다. 최대한 내 잘못을 부풀려도 얼굴에 홀렸던 죄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선배 체면이 있지 양다리 당해서 헤어진 이야기를 후배한테까지 알리고 싶진 않았다.
히구치 쇼타 넌 죽었어. 지갑 속에 있는 지폐들한테 작별인사해둬라.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씩씩 거리면서 히구치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미부치가 전화를 걸어오는 게 조금 더 빨랐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전화를 받자 미부치가 괜찮냐고 물어왔다. 누가 들으면 어제 헤어진 걸로 오해할 만큼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미부치의 어깨너머 어딘가에서 울지 말라고 말하는 하야마의 목소리도 들렸다. 미부치가 여전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코타로가 통화 내용을 들어버렸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히구치가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이유가 두 배로 늘었다는 이야기다.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옛날 일인데."
"그치만 선배 울었다면서요. 정말, 여자를 울리는 쓰레기가 농구부에 있었다니 말도 안 돼!"
음…아카시도 세이린 매니저 여자애를 울렸댔나 아무튼 뭔가 나쁜 말을 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지만 지금 할 얘기는 아니니까 접어두자. 그나저나 이 얘기 걔도 아는 건가. 쪽팔리니까 몰랐으면 좋겠는데.
"아니 뭐…그때 흘렸던 눈물도 지금쯤은 기화해서 구름이 되었다가 비로 내리는 과정을 열두 번 정도 거치지 않았겠니."
"선배가 비가 될 정도로 울었대!"
하야마의 청해력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아니…."
내가 뭔가 항변을 하기도 전에,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야마?"
"앗, 세이쨩…."
아이고 두야.
히구치에게 내일 간식 포함 세끼를 풀코스로 뜯어먹을 일정이 잡혔다. 아카시가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미부치가 내 허락을 받고 아카시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목소리를 전화 너머로 들으며 마음 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웠다. 음…그럼 이대로 전화 끊고 절에 들어갈까.
"선배."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귀신 같은 타이밍에 아카시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죄송해요. 힘든 이야기일 텐데."
"아냐, 옛날 일이고…."
옛날 일이라고 요새 몇 번째 말하는 거지. 지금 힘든 건 내 수치심이다. 그나마 교토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얼굴 보고 있었으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최근에도 연락 받으시는 거죠?"
"그건 그렇지…."
하지만 구남친이란 다들 그런 거 아닌가. 얘가 유독 질척거리긴 하지만 다른 구남친들도 새벽 두 시만 되면 전화하는 건 비슷하다. 아카시라면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선배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잖아요."
"음. 그것도 그렇지…."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어쩐지 화난 것처럼 들렸다.
"선배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면…화가 나는 걸 어쩔 수가 없어요."
착각이 아니었구나.
히구치나 다른 애들도 그렇고, 내 구남친이 쓰레기라는 사실에 대신 화내줄 필요까진 없는데. 이걸 내 인덕 탓이라고 해도 좋은가. 그냥 도덕심이 열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의 쩔어주는 인성 덕분이라고 생각하자. 나도 참 죄 많은 여자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없나요?"
"뭘 도와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거나."
"아니 됐어…."
아카시가 이렇게 말하면 이마요시랑은 다른 방향으로 전혀 농담 같지 않게 느껴진다. 대체 무슨 '응분의 대가'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얘도 필리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좀 아까운데.
"아니다. 음…길 가다 보면 남들 몰래 뒤통수라도 한 대 쳐줄래?"
"그럴게요."
아카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왕이면 네부야가 쳐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큰 희망 사항인가. 아니야, 걔가 치면 죽을지도 몰라.
"그래…걱정해줘서 고마워. 미부치랑 하야마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처음엔 쪽팔렸지만 털어놓고 나니 의외로 꽤 후련하다. 다들 나보다 더 진지하게 화를 내줘서 그런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농구부에서 3년이나 일했던 것도 완전히 의미가 없진 않았구나. 그것만은 얼굴에 홀렸던 것도 감사해두자.
"네, 꼭 찾아낼게요. 확실히 교토에 있죠?"
"아니 꼭 찾을 것까진 없는데…일단 그럴걸. R대 갔거든."
"그 사람이 도쿄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당장 가고 싶어도 그럴 순 없으니까."
"그으래.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네."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너무 즉답이 돌아와서 조금 놀랐다.
"어…, 음, 그래. 고마워."
대답이 좀 어색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참나, 좋아하는 여자애도 있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기 있냐. 중학교 때도 이러고 다녔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 애가 차인 건 쿠로코 때문만은 아닌 게 틀림없다.
"선배."
"응?"
"다른 것보다, 당장 가고 싶다는 건 정말이에요."
"……."
그러니까 아마 넌 그런 점이 제일 문제였을 거라니까.
한층 더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히구치를 홀랑 벗겨 먹고, 또 다시 연락해온 구남친에게 밤길에 뒤통수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단했고, 이마요시에게 예의 필리핀 이야기를 전달 받아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어디에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리고 내가 익명의 교토 소식통으로부터 라쿠잔 고교 농구부가 R대 농구부에 전국 대회 대비 실전 연습 시합을 신청해 더블 스코어의 무참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