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빨간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上
*정말 오랜만에 드림주 이름 있음
*아카시보다 좀 많이 연상인 드림주
*꾸금씬은 하편에 나와요....
빨간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上
야마다 코코하가 맞선 이야기를 들은 건 귀국한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의 가족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맞선?"
그 말이 어찌나 갑작스러웠는지, 그녀는 무심코 아버지에게 잠꼬대는 자면서 하라고 말할 뻔했던 것을 간신히 참고 말꼬리를 잘라 삼켰다.
"그래, 맞선이다."
"내가? 누구랑?"
"흠흠, 너도 본 적이 있는 아이야. 아주 유서 깊은 명문가의 외동아들인데 어릴 때부터 학력도 우수하고 운동으로는 전국대회에서도 우승한 적이 있다고 하고, 지금은 명문대에 입학해서…."
줄줄 이어지는 칭찬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왔다가 한 귀로 흘러나간다. 슬렁슬렁 들은 끝에 본의 아니게 맞선 상대의 스펙을 이것저것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름은 듣지 못했다. 이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아무튼 큰일이겠다 싶다. 코코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게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홀짝홀짝 넘겼다.
"…그래서 놀랍게도, 아니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구나. 아무튼 그쪽의 제안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야."
제대로 된 정보 값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이야기가 끝난 건 코코하가 와인잔을 거의 다 비우고 난 뒤였다.
그 집 망하기라도 했나. 이야기를 들은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졸부집 딸과 유서 깊은 명문가의 고스펙 외동아들과 맞선이라니 이게 21세기에 할 소린가. 손바닥만 한 할리퀸 소설책에나 나올 법한 설정이다. 고리타분해서 먼지 냄새가 날 것 같기까지 했다.
"이번 주말에 약속을 잡아뒀단다."
"내 생각엔…주말에 바쁜 일정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일정이니?"
"그건 지금부터 정해봐야지."
코코하가 뚱한 얼굴로 한 말에 아버지는 한숨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냈다.
"대체 너란 애는…유학 가기 전에도 맞선 자리에서 좋은 집 도련님들을 몇 명이나 울려서 파토내놓더니…! 난 도대체 네가 좋은 남편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 밤에도 잠이 안 오고…."
아버지는 반쯤 울먹거리는 어조로 행복한 가정에 대한 일장연설을 이어갔지만, 물론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단 하루도 효녀로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그 반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알아서 잘생기고 조신한 놈으로 골라온다니까. 걔네는 하나같이 죄다 못생기고 키도 작고 멸치거나 돼지거나 둘 중 하나였잖아."
"또, 또! 그 얘길 면전에서 하면 안 되지!"
"지가 잘생겼다고 착각하면서 재수 없게 굴지만 않았어도 그런 말 안 했어, 나도."
코코하는 남은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맞선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더 나오기 전에 얼른 집에 가야겠다 싶었다. 방이 남아도는 저택에서 굳이 나와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다행이었다.
"그럼 얘기 끝난 걸로 알고 나 먼저 집에…."
"내 생각엔 그 애 얼굴이 딱 네 취향일 것 같은데. 샤프하고 귀엽거든."
말만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어머니가 한 마디를 보탰다. 그 말에 솔직히 좀 혹했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의자에서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사진 있어?"
"지금은 없지만…기억하고 있지? 아카시 가의 도련님 말이야."
"아카시? 어…."
코코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옛날에 부모님을 따라 그 집안 사모님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었던가. 그 집 꼬마 도련님이 혼자 멍하니 현실감 없는 얼굴로 방치 당하고 있는 걸 발견해서 챙겨주고, 그 뒤로도 몇 번 만나 같이 놀아주었더니 졸졸 잘 따랐던 것이 서서히 생각났다.
이름은…세이쥬로였던가.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색창연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코코하는 그를 세이 군이라고 부르면서 상당히 귀여워 해주었다. 척 보기에도 같이 살기 힘들어보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도 착하고 귀엽고 똑똑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그녀라면 그 아버지와 사느니 그냥 가출했을 것이다. …까지 생각했던 코코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올렸다.
"응? 그 집에 세이 군 위로 아들이 또 있었던가?"
"어머, 얘도 참. 세이쥬로 군이 들으면 섭섭해 하겠다. 외동 아들이야."
그런 말을 들으면 더욱 의문이 생긴다.
"…걔 지금 몇 살이더라? 마지막으로 봤을 땐 중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올해 대학에 입학했단다."
"……."
내가 대학을 몇 년에 입학했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 코코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다음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 집 요새 좀 어렵대?"
확실히 코코하는 주로 연하남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벼운 만남일 경우다. 보통 맞선에 나오는 상대는 이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것도 남자 쪽이 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이제껏 코코하가 만났던 맞선 상대들도 보통 그녀보다 두세 살 위였다. 그 애랑은 열 살…하고 또 몇 개월 더 차이가 나던가? 그 나이 또래 아가씨들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굳이? 다시 생각해보아도 역시 가정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예상외의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니. 이번엔 일도 같이 하게 되었어. 세이쥬로 군도 종종 참석해서 거든단다. 성실하지?"
"으응…."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의 코코하는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바빠서 아버지의 생일조차 까먹었다. 아카시 가의 도련님은 정말 성실하게 자란 모양이었다. 하긴 어릴 때부터 참 착한 애이긴 했다. 코코하는 기억의 서랍을 뒤집어 언제나 수줍은 듯이 웃으며 이야기하던 얌전하고 똑똑한 남자아이에 대한 것을 몇 가지 떠올렸다. 아기 천사 같은 남자애가 잘 따르고 말도 잘 듣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아서 그녀치고는 드물게도 귀여워하며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 났다.
"세이쥬로 군이 코코하가 완전히 귀국했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니?"
"으음."
어릴 때 잘 놀아주었던 사람을 보고 싶었던 걸까. 그 집 아저씨를 생각하면 확실히 정에 굶주릴 것 같은 느낌은 든다. 하긴 유학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늘 바쁜데다 비행기를 타는 것도 귀찮아서 귀국했던 일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보고 싶어할 만은 했다. 초창기엔 그래도 종종 연락을 했지만 점점 연락이 줄어서 어느 날부턴가 전혀 메일도 주고받지 않게 되었다. 어른으로서 좀 무책임했나 싶은 생각은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 번 쯤 만나보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이번 사업을 아카시 씨와 함께하게 됐는데…."
맞선이라는 것도 뭐 사업 상 문제로 호의를 보이는 정도 수준의 일일 것이다. 어쨌든 코코하는 이쪽 동네 기준으로는 결혼이 늦은 편에 속했으니까. 다시 물어보지 않은 사업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코코하는 머릿속에 약속 장소와 시간을 메모했다.
그렇게 찾아온 주말, 코코하는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적당히 추억팔이라도 하고 오면 그만이겠지 싶다. 맞선이니 뭐니 해도 그다지 무거운 자리도 아니었다. 저쪽에서 먼저 당사자 외에 부모는 동석하지 않을 것을 제안해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코코하에게는 도무지 그 집 아저씨 얼굴을 보면서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운전할 때는 불편해서 벗어두었던 구두를 다시 신고, 그다지 얌전한 디자인은 아닌 모 브랜드의 50만엔 짜리 원피스 자락을 정리하며 차에서 내렸다.
맞선 상대…그러니까 세이 군은 마지막으로 본 게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쯤이었으니 상당히 많이 자랐을 것이다. 그맘때 남자애들이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법이니까. 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걱정을 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이유로 상대의 사진을 주지 않았고, 그냥 장소에 상대가 먼저 도착해있을 거라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대체 무슨 재미를 찾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러니까, 머리는 빨갛고 피부가 하얗고 눈이 컸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니 기억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때도 나중에 여자 여럿 울리겠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는 건 확실했다.
"코코하 씨."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던 코코하를 부른 건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
뒤를 돌아본 코코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취향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은, 세련된 인상의 미남이 우아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빨간 머리에 새하얀 피부, 덩치가 큰 건 아니지만 옷태만 보아도 제법 운동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체형까지. 아직 앳된 티가 남은 단정한 얼굴에 깔끔한 정장이 잘 어울리는 것이 완벽하게 취향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맞선이고 나발이고 확 얘를 꼬실까 생각하던 코코하는 문득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그러고 보니 색배합도 딱 맞는다. 아니 그래도 설마.
"…세이 군?"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을 입 밖에 내자 그가 수줍은 듯이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코코하 씨."
설마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잡았다. 코코하는 살짝 발그레하게 물든 하얀 눈가를 홀린 듯이 보다가 입을 벌렸다.
다시 보니 섬세한 이목구비에 어릴 적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랄 일인가.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보았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몰라보게 자란 것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쑥쑥 자라서 어머니의 단언대로 보는 순간 혹할 정도의 미남이 된 것을 보니 아무튼 시간의 흐름이란 대단한 거구나 싶었다.
"오…그래. 오랜만이네. 그동안 많이 컸구나, 세이 군. 못 알아볼 뻔했어."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얼빠답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약간 들떴다. 비록 내용은 오랜만에 보는 먼 친척 어른이 하는 말 같았지만. 하긴 거의 비슷한 입장이기는 했다. 그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사에도 그는 기쁜 듯이 웃었다.
"코코하 씨는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정말? 고마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매력적이세요."
"뭐어? 하하하."
이런 귀여운 립서비스는 어디서 배웠을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 뒤로 예약해둔 별실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코코하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릴 적에 예뻐해 주었던 어린애가 잘 자란 것을 오랜만에 본 것도 좋았고, 귀여운 말만 골라 하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 어느 때라도 미남의 웃는 얼굴은 활력을 주는 법이라는 게 코코하의 생각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거의 6년 동안은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어릴 적 이야기만으로도 화제가 충분했다. 그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가족을 대신해 농구 경기를 응원하러 갔던 일, 한 번도 영화관에 간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영화관에 가서 아무 영화나 골랐던 것이 끔찍하게 지루한 삼류 영화였던 일, 생일 선물로 주었던 크리스털로 된 체스말 세트를 아끼면서 도무지 쓰려고 하지 않아서 결국 그녀가 직접 체스 룰을 배워 함께 놀아주었던 일, 그녀가 유학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던 일….
그런 이야기들을 돌아보고 있으니 그때의 그 꼬마가 이렇게까지 잘 자라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것이 새삼스럽게 감격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코코하는 디저트를 맛보면서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았지만 거의 청년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된 뽀얀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정말 요만했는데."
"그렇게까지 작지는 않았어요."
허리께에도 오지 않을 위치에서 손을 흔들자 아카시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부정했다. 확실히 좀 지나치게 작은 위치를 잡은 것 같기는 했다. 그때도 어쨌든 중학교에 막 들어간 청소년이기는 했으니까.
"그랬나? 그래도 매일매일 코코하 씨 코코하 씨 하면서 병아리처럼 졸졸 쫓아다녔던 건 사실이잖아."
"병아리…."
"정말 귀여웠는데. 언제 이렇게 자랐니."
그야 박제도 아니고 사람이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길거리 포장마차 간식을 사다 안겨주면 눈을 동그랗게 뜨던 꼬마와의 간극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 단계가 어디로 어떻게 사라져버렸을까. 이런 걸 미싱링크라고 하던가. 처음으로 진화론을 들은 기독교인의 흐느낌이 이랬을까. 정말 요만했는데. 코코하는 '요만했던' 사이즈에 대한 집착을 도무지 버리지 못하고 손을 그 근방에서 조금씩 올렸다 내렸다 했다.
"이렇게 자란 건 별로인가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카시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딘가 조바심을 내는 태도였다. 코코하는 이 다음 코스로 디저트를 하나 정도 더 먹으러 갈지 말지 고민하느라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아니, 지금도 귀여워."
"귀여운…걸 좋아하세요?"
"좋아하지. 누가 싫어하겠니."
"그럼, 저도 이대로 괜찮나요?"
"응? 응."
"남편으로도요?"
"…?"
다른 생각을 하며 적당히 대답하던 코코하가 이상함을 느낀 건 그 시점이었다. 최근에 좋아하던 여자에게 차이기라도 한 걸까. 저 정도로 생기고 매너도 좋고 집도 잘 살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본인 스펙도 훌륭하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텐데. 아무튼 코코하가 그 여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눈앞의 남자를 홀라당 따…아니지, 이건 아무래도 어린애를 상대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비록 전남친이 이 애와 비슷한 나이이긴 했지만 아무튼 간에.
코코하는 본능을 다시 도덕심으로 꽁꽁 묶어 마음 속 깊은 곳에 봉인한 뒤, 재빨리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 세이 군은 빨리 결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점은 남자애답다. 코코하로 말할 것 같으면 적어도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결혼에 대해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몇 개월 남지 않았지만 어쨌건.
"그럼, 그럼. 세이 군이 빠지는 게 뭐가 있니. 인기도 무지 많겠네. 지금 장가가도 되겠어."
하나 마나 한 말이라도 칭찬을 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그녀는 큰 누나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적당한 덕담을 해주었다. 물론 이런 말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듣는 게 아니면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코코하의 귓가에 정말로 안심한 것 같은 목소리가 닿았다.
"다행이에요."
"응?"
코코하는 고개를 들었다가, 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가 그렇게…다행이니?"
고양이 같은 눈매가 애교를 부리듯이 휘어져 미소를 보낸다. 열이 오를 것 같은 시선이 코코하의 뺨과 콧대를 타고 올라와 눈 중앙에 똑바로 떨어졌다. 유혹이라고 하기엔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도를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저, 코코하 씨에게 장가 가려고 나온 거니까요."
"세이 군…너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잖니. 벌써 인생을 정략결혼에 바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닐까."
코코하가 장난처럼 말하자 그가 긴장한 듯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살짝 핥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왔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코코하의 손 위에 올려져, 아주 조심스럽게 손등을 두드린다. 붙잡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전혀 이르지 않아요."
"음."
떨리는 목소리가 말한다.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하얀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가, 다시 천천히 눈을 마주쳐온다.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마다 코코하는 남자에 익숙했고, 무엇보다 보통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좋아해요, 코코하 씨. 열 살에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코코하 씨가 첫사랑이었어요."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것이 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