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쿠로바스: 첫사랑 프로비던스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첫사랑 프로비던스 -3

양철인간 2018. 2. 13. 03:29
3.





아카시 세이쥬로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소년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1학기가 지나는 동안 있었던 두 번의 시험에서는 늘 성적이 좋았고, 오랫동안 강호로 유명했던 농구부에 입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주전을 차지했다.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성격의 학생회 임원으로 교사들에게도 신뢰받았고, 다소 귀여운 인상이긴 하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미소년이다. 게다가 입학식 날 대단한 리무진을 타고 온 그를 학교 근처에서 보았다는 목격담이 퍼진 일도 있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아카시 님'이라는 호칭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토 미오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종종 그 호칭을 사용하곤 했다. 약간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대단히 어울렸으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누구나 그렇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과 대화할 때는 평범하게 아카시 군이라는 호칭을 썼다. 본인이 아카시 님이라는 호칭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학기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미오는 학생회실에 늦게까지 혼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면 붐비는 도서실 대신 학생회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학생회의 몇 안 되는 특권 중 하나였지만, 대부분의 학생회 임원들은 부 활동이나 학원 때문에 바빠서 오래 있지는 않고 돌아간다. 덕분에 부 활동도 학원도 해당 사항이 없는 미오가 늘 가장 마지막까지 남게 되곤 했다.

그 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각까지 남아 있었다. 문제집의 해설을 보아도 잘 알 수 없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느라 미리 정해두었던 목표치를 달성하는 것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미오는 성실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집중력이 좋았다. 한참 열심히 공부하다가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해진 하교 시각이 거의 다 되었을 때였다.

이렇게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어본 것은 처음이지만,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혼이 나게 될 것이라는 건 알았다. 미오는 집으로 갈 준비를 서둘렀다. 너무 지나치게 서두른 탓에 필통을 엎기까지 했다.

"앗!"

미오는 울상을 지으며 떨어트린 필기구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누군가가 학생회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네!"

귀가를 재촉하러 온 학교 경비일까. 급하게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이것만 줍고 금방 간다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것과 다르게, 열린 문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 밖의 얼굴이었다.

"…아카시 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부활동이 끝나고 놀아간 게 아니었던 걸까. 깜짝 놀란 미오가 자리에 쪼그려 앉은 채 아카시의 단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토. 혼자야?"
"어, 응."

총명한 소년은 잠시 실내를 본 것만으로도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금세 다가와 미오의 앞에 몸을 구부렸다. 바닥에 떨어진 펜과 지우개를 집어 건넨다. 미오는 얼른 손을 뻗어 받아들었다.

"고마워."
"이 시간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누군가가 불을 끄는 걸 잊고 간 걸까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시간이네."
"성실하구나. 그래도 이제 돌아갈 거지?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어."
"응…. 가야지."
"정리 도와줄게."

도움을 받으니 떨어진 필기구를 정리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서둘러 필통을 정리하고 노트와 책을 챙겼다. 아카시는 미오가 가방을 전부 챙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복도와 계단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이런 시각까지 학교에 있었던 건 처음인 미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는 미오에게 아카시가 물었다.

"사토는 후문으로 하교해?"
"응."
"나도 그쪽으로 가는데 다행이네. 함께 하교할까."

예상 외로 너무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았지만, 이 제안은 뜻밖의 행운이라고 할 만했다. 미오는 마음속으로 마음껏 만세를 불렀다.

"잠시만. 문 잠글게."

아카시가 문을 잠그는 사이 달빛으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복도 끝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바로 며칠 전에 선배에게 들었던 학교의 괴담이 생각났다. 밤이 되면 과학실의 인체모형이 복도를 움직인다거나 1층 중앙계단의 13번째 단을 밟으면 죽게 된다거나 옛날에 자살한 학생의 유령이 말을 건다거나…들을 때엔 독창성이라곤 없는 괴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때에 생각하니 독창성이 없는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어느 영화에서인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을 떠올릴 것 같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쾌한 상상은 아니었다.

미오는 소름이 돋은 팔을 슬쩍 쓰다듬으면서 복도에서 시선을 뗐다. 어두운 복도를 배경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은 여기 있는 아카시도 아카시 본인이 아니라 귀신이라든가…그가 등을 돌리면 뭔가 원한에 휩싸인 창백한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을 보면 분명히 그랬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미오는 애써 생각을 털어버리려다가 때마침 문단속을 마친 아카시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어두운 복도에서도 미오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확실히 보였을 것이다.

"내가 놀라게 했어?"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중학생씩이나 되어서 괴담 생각을 하는 바람에 무섭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 변명할 말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었다. 입을 뻐끔거리는 미오를 보던 아카시가 이내 적합한 결론을 찾았다.

"혹시 어두워서 무서워?"
"조, 조금."

미오는 단지 어둡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선배에게 들은 괴담을 몇 가지 이야기했다.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준 아카시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는 괴담이 있기 마련이긴 하지만…나는 들어본 적 없어. 아마 선배의 장난일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 발밑 조심해."
"응…."

아카시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아카시가 모른다면 없는 일이겠지. 미오는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행히 계단도 12단에서 끝났다. 그래, 역시 너무 뻔한 괴담이었다. 애초에 귀신 따위가 있을 리가….

"아, 하지만 최근 제3 체육관에 뭔가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들었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차에 아카시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미오는 신발장을 열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카시를 돌아보았다.

"체육관에서 공이 튕기는 소리나 발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다고…."
"…!!"

아카시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진담일까?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진지한 얼굴이었다.

후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게 3체육관이었던 것 같은데…. 미오는 힐끔 후문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조금 돌아가게 되긴 하겠지만 정문으로 갈까. 딱히 정말 귀신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냥 너무 늦었고 밖은 어둡고 후문쪽 길에서 큰 길로 통하는 곳에는 가로등이 적기 때문에….

거기까지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던 미오의 생각을 방해한 건 작은 웃음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돌아본 곳에서 아카시가 어깨를 떨면서 큭큭 웃고 있었다.

"…아카시 군?"

설마.

미오가 의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과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그렇게까지 무서워할 줄은 몰랐어."

설마 아카시가 이럴 줄은. 미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녀를 보고 아카시가 다시 낮게 웃었다.

"사토는 겁이 많구나."
"……."

그렇게 말하는 말꼬리에 웃음이 잔뜩 붙어있었다. 완전히 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오는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카시를 흘겼다.

"미안해. 지금 건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정말로."

그렇게 말해도 여전히 웃는 얼굴에는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미오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 옆에서 아카시가 천천히 웃음을 갈무리했다. 그런 모습이 얄미웠지만 이렇게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또 속절없이 설레는 것도 사실이었다. 미오는 약간 달아오른 얼굴이 들키지 않길 바라면서 공연히 더 투덜거렸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왕자님으로 통하는 아카시 님이 이런 장난을 친다고 누가 믿겠어, 정말."

그 말에 아카시가 곤란한 듯이 웃었다.

"그 호칭은 좀 멋쩍은걸."
"어느 쪽 말이야? 왕자님? 아카시 님?"
"둘 다."
"흐음. 그럼 아카시 왕자님은 어때."
"놀리지 말아줘."

호칭이 멋쩍다고 말하는 아카시도 색다른 느낌이다. 이런 걸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았던 보람이라고 해도 괜찮을까. 물론 오늘의 제일 큰 소득은 아카시와 함께 하교하게 된 일이겠지만. 미오는 자꾸만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면서 아카시와 함께 후문으로 향했다.

문제는 조금 전에 아카시가 말한 3체육관이 후문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냥 놀리려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돌아본 제3 체육관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정말 공이 튀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움찔거리는 미오에게 아카시가 웃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저 안에서는 아오미네와 다른 농구부원이 연습 중이야."
"아, 정말?"
"정말로. 아오미네는 알지?"
"응. 같은 반인걸."
"아오미네와 함께 연습하는 사람이 잘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이라 그런 소문이 났던 모양이니 안심해."

그 설명을 들으니 다행히 앞으로도 후문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아카시의 옆으로 얼른 걸음을 옮겼다. 평온한 마음으로 시험, 학생회 일, 여름 방학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하다 보니 후문에서 큰길까지도 금방이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사토. 내일 보자."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길에서 아카시가 미오에게 신사답게 인사했다.

"응. 내일 봐, 아카시 님."

그 인사에 아카시가 웃었다. 미오는 아카시가 몸을 돌려 걸어가는 것을 잠시 지켜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아카시가 늘 정문으로 하교한다는 사실을 미오가 알게 된 것은 그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