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건 -3
1. 후지사키 라이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연(3)
아카시 세이쥬로가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신인 작가의 라이트노벨 <회장개>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유즈미 치히로를 통해서였다. 졸업 전의 은퇴식에 불참한 마유즈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갔던 날, 졸업할 때까지 더이상 말 걸지 말라며 몸을 돌리려던 그가 갑자기 아카시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던 것이다.
"모른 척하려고 했지만 마지막이니까."
붉은 머리에 양쪽의 색이 다른 눈을 한 여학생이 심약한 인상의 남학생을 발로 밟고 서 있는 일러스트 표지의 라이트노벨이었다.
"마유즈미 상, 이건?"
"여동생 캐릭터는 안 나올 것 같으니까 돌려주지 않아도 돼."
여동생 캐릭터가 대체 무슨 속성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리얼충에게는 가혹하게도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자, 첫 장부터 검도 전국체전 결승전에서 상대를 무릎 꿇린 여학생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머리가 높다.'
그것이 대략 3개월 전, 아카시와 <회장개>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 만남 이후로 후지이 무라사키의 정체에 다소 흥미가 생겼다. 열과 성을 다할 정도의 관심은 아니고 그냥 누군지 알게 된다면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정도의 관심이었다.
소설의 디테일을 살펴본 결과 작가 본인이 라쿠잔의 학생이라는 것은 명확했지만, 딱히 교내에 후지이 무라사키의 정체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그럴 만큼 유명한 책이 아닌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여학생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내용은 작가가 남학생이라면 기분 나쁠 정도였다. 1학년의 몸으로 농구부 주장 역할을 수행할 때의 모습이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높은 확률로 같은 학년이지만 같은 반은 아닐 것이고, 농구부 연습 시합을 자주 보러 왔을 것이다. 그리고 백 퍼센트의 확률로 오타쿠 취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몇 번이나 소거법을 적용해도 여전히 그 전부에 해당되는 후보는 많았으므로, 그것만이라면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4월이 오고 2학년이 되면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후지사키 라이무와 같은 반이 되었다.
매번 노골적으로 관찰하면서 스마트폰에 뭔가 메모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면서 시선을 피하는 여자애에게 수상함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작년에 같은 반이 아니었던 건 확실하고, 연습 시합이 있을 때면 객석에서 몇 번인가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교내의 거의 모든 여학생의 이름을 알고 있는 농구부원에게 확인한 결과 사실이었다.
게다가 후지사키 라이무와 후지이 무라사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어려울 정도로 노골적인 애너그램이었다. 애초에 숨길 생각은 있었던 건지 묻고 싶다. 평소 하는 행동을 보면 별로 아무 생각 없이 지은 게 틀림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거기까지 눈치를 챘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시 세이쥬로가 후지사키 라이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일이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지는 아직 2주도 채 되지 않았다. 2학년이 되면서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여자아이에 대해 자세히 알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다소 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을 동원하면 2주 안에 출생의 비밀까지 알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같은 반 여학생을 상대로 그런 짓까지 할 예정은 없었다.
덕분에 그가 후지사키 라이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예의 그 소설에 관련된 사실과, 클래스메이트로서 당연히 알 수 있는 피상적인 이미지 몇 가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 중에는 눈앞의 여자아이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겁쟁이라는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
그것도 심지어 분위기를 풀고자 했던 한 마디에 맨발로 뛰쳐나가서는 자판기 하나를 통째로 털어올 정도로 겁이 많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녹차와 미네랄 워터, 이온 음료, 딸기우유, 밀크티, 오렌지 주스, 포도 주스, 비타민 음료, 단팥죽…종류별로 나란히 선 음료 캔들과 그 앞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여자아이를 번갈아 보며 아카시는 약간 눈썹을 모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맹세코 이제껏 한 번도 남에게서 위력으로 뭔가를 갈취해본 적은 없다. 아니,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좀 미묘한 문제지만…아무튼 복종이니 승리니 하는 것 외에 물질적인 무언가를 갈취해본 적은 정말 없었다.
물론 자발적인 선물이라면 받아보았다. 그녀에게서 익명으로 받은 선물들도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후지사키 상."
"네, 넵!"
잔뜩 긴장한 채 금방이라도 또 맨발로 뛰어가 1층 자판기를 털어올 것 같은 여자아이를 보니 절대 이걸 선물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도, 독은 안 넣었습니다!"
아니, 역시 선물이라곤 절대 할 수 없다. 그보다 그런 흉흉한 의심을 한 적도 없다.
그다지 험하게 대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어쩐지 잔뜩 겁을 먹은 여자애. 의도치는 않았지만 강제로 갈취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음료수. 여학생을 핍박하는 것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이래저래 태어나서 처음 겪는 난제였다.
저도 모르게 한숨 비슷한 것을 쉰 그를 보고 라이무가 펄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역시 새로…!"
이래서야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해봐야 전혀 듣지 않을 게 뻔했다. 여전히 실내화를 신고 있지 않은 여자아이를 소파 위로 돌려놓기 위해서 아카시 세이쥬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니야. 이걸로 할 테니까 갈 필요 없어."
아카시가 서둘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이온 음료를 집어 들면서 말하자 라이무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하곤 다시 소파 위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을 하고선 유서…써둘걸…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고 하고 있는 모습은 처벌을 기다리는 죄수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었다.
아카시는 뚜껑도 열지 않은 이온 음료를 탁자 위에 올려두며 라이무에게 말을 걸었다.
"후지사키 상은 아무것도 마시지 않을 생각이야?"
애초에 마실 것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녀가 너무 긴장해 있어서였다. 오히려 역효과로 이상한 방향으로 긴장시켜버린 모양이었지만
그의 말에 라이무는 다시 화들짝 놀라면서 음료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채 탁자 제일 끝에 있던 캔을 하나 집어갔다. 그리고 눈을 딱 감은 채 사약이라도 마시는 사람처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물론 그렇게 마시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들었을 리가 없다는 건 알았다.
10분 만에 후지사키 라이무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매우 많이 알게 된 아카시는 다른 접근 방법을 택했다.
"우선, 전에 받은 장갑과 손수건은 마음에 들었어. 고마워."
음료수가 아닌 선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수상한 선물은 그냥 받았을 뿐 사용한 적은 없지만 디자인이나 소재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사실이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셨다면 한 박스 더…!"
"아니 한 박스까진 필요 없으니까."
거절의 말은 매우 급하게 나왔다. 놓아두었다간 백화점까지 맨발로 달려갈지도 모른다. 소파에서 약간 일어났던 라이무가 다시 얌전히 앉았다.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어.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생각해.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비꼬는 건 아니야."
말을 덧붙였지만 보람 없게도 라이무가 전혀 못 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불신을 산 건 또 처음 있는 일이다. 대체로 난 패배를 모른다든가 모든 것에 이기는 나는 전부 옳다 같은 소리를 진지하게 해도 신뢰를 받았던 아카시에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같은 반 여학생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가득 찬 채 지진을 일으키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오히려 유쾌해질 정도로 신선했다.
"그런데 후지사키 상이 그 소설을 쓴 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인 거지?"
라이무의 손에 들려있던 캔이 땡그랑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비운 캔이라 내용물이 바닥에 흐르는 일은 없었다.
"네, 네…비밀…."
특히 너한테 제일 비밀…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역시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어. 그렇게까지 숨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라이무가 절대 비밀로 하고 싶었던 상대 0순위는 새하얗게 질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지었다.
"네가 비밀로 하고 싶다면 나도 그렇게 할게."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이무의 얼굴은 더 새파래졌다.
"……."
어째서일까. 스스로 말하기는 좀 뻔뻔한 감이 있지만 아카시는 자신이 적어도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는 않는 용모라고 생각했다. 미소 지으면 얼굴을 붉히는 여학생들도 종종 있었으므로 아마 틀린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회장개>의 표지를 보고서 진상을 알아차렸다.
"참, 그러고보니 소설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왔었지."
<회장개> 속에서 미츠보시 아카네가 쿠도 와타루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할 때 했던 대사가 이것과 비슷했다.
'쿠도, 네가 이 사실을 계속 비밀로 하고 싶다면 나도 그렇게 할게.'
아니, 완전히 똑같았다. 그쪽에는 원래 '내 개가 될 경우에 말이야.' 같은 말이 붙어 있기는 했지만. 얼마 전에 다시 읽었기 때문에 대사가 뇌리에 남아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절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사람을 개로 삼는다니, 그런 일을 할 리 없다. 승리를 위한 도구로 쓰는 짓은 해보았지만 아무튼 개로 삼은 적은 없다.
"소설에서는 분명히 이다음 대사가…."
소설 이야기로 이끌고 가기 위해 운을 떼자 라이무가 대답했다.
"머, 멍멍…?"
분명히 그런 대사가 나왔던 기억은 있지만 그렇게 대답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
할 말을 잃은 아카시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한 바퀴…아니 세 바퀴 돌까요?"
그런 장면이 나왔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을 재현하라는 뜻은 정말, 결단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