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쿠로바스: 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건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건 -2

양철인간 2017. 12. 26. 02:21

1. 후지사키 라이무가 학생회장님의 개가 된 사연(2)






인기리에 절찬 판매 중…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희망 사항이고, 현실적으로 그럭저럭 발행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팔리고 있는 후지이 무라사키 작 <회장개>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서면 작약 앉으면 모란,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카리스마 있으며 문무를 겸비한 완벽초인 미소녀 학생회장 미츠보시 아카네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바로…그녀의 왼쪽 눈에 또 다른 인격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새로운 인격이 깃들게 된 것은 아홉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다. 생일파티를 마친 밤, 잠이 오지 않아 저택 안을 돌아다니던 미츠보시 아카네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봉인되어 있던 지하실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수 백 년 간 잠들어 있었던 흑염룡을 봉인에서 깨우고 말았다.


유성의 흑염룡. 그렇게 불리는 존재는 깨어난 직후 아카네의 왼쪽 눈에 깃들어 그녀가 잠들 때마다 깨어나는 새로운 인격이 되었다. 대단히 고압적이며 폭력적이고 현대 기준으로는 중2병이기까지 한 인격이었으므로, 아카네는 인생에 단 하나의 흠결도 인정할 수 없는 미츠보시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숨겨야 했다. 그 후로 7년 동안 그녀의 부모와 미츠보시 가의 당주인 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입학할 때부터 전교 수석, 학생회장에 검도부 부장, 전국대회 우승자 기타 등등 비할 데 없는 하이스펙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간 미츠보시 아카네는 어느 날 왼쪽 눈의 흑염룡이 날뛰는 광경을 같은 반의 남학생에게 들키고 만다. 이 남학생이 바로 <회장개>의 남자 주인공인 쿠도 와타루였다.


정신을 차린 아카네는 우선 와타루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정보력을 총동원해 쿠도 와타루의 치명적인 약점(자세한 것은 작중에서 밝혀지지 않았음)을 알아내고, 그것을 빌미로 곁에서 감시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개'로 삼게 된다…는 것이 초반 설정이었다.


이 <회장개>를 쓰기까지 후지사키 라이무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정확히는 미츠보시 아카네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인기가 높지 않아 단권으로만 계약하고 끝났던 전작의 제일가는 약점이 '여자 주인공 캐릭터가 약하다'였던 탓이었다.


다만 그 점을 신경 써도 좀처럼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를 만들 수 없어 고민하던 1학년 2학기 초의 어느 날….


"이번에도 수석은 아카시 님이네."

"입학 때부터 학생회장에 농구부 주장까지 하면서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지. 신기해."

"농구도 전국대회 우승이라며?"

"대단해."


"…!"


그런 대화를 듣고 깨달아버린 것이다.


같은 학교에 불공평과 불합리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임팩트의 극치에 가까운 캐릭터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후지사키 라이무는 그 날부터 아카시 세이쥬로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같은 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관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종종 농구부의 연습 시합 같은 것을 보러 갈 수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참가해 내내 아카시를 관찰했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교내에는 '아카시 님'을 아이돌처럼 추종하는 수많은 여학생들과 약간의 남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카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아카시에게 (약간 종류가 다른) 관심이 많았던 라이무는 어렵지 않게 그들과 어울려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정보망은 가히 아카시 사생활 DB라고 할 만했다. 키가 173cm이라든가(그래서 미츠보시 아카네도 173cm가 되었다) 취미가 바둑 장기 체스 같은 머리를 쓰는 게임이라든가(그런 설정을 부여하고 덩달아 룰을 공부했다) 생일이 12월 20일이라든가(아카네의 생일도 똑같다)…각종 지엽적인 설정들은 전부 그들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후천적인 영혼의 종이 쌍둥이를 얻은 셈이다.


이번에야말로 캐릭터 설정을 ok 받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결정되었을 때 라이무는 뛸 듯이 기뻤다. 다만 11월 12일에 재채기를 연달아 세 번 했고 복도에서 농구부의 누군가와 1분 19초간 이야기했다는 식의 지나친 정보까지 들어오는 데에는 아무리 차기작 욕심에 눈이 먼 오타쿠라도 완전히 양심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라이무는 통장에 넣어두었던 계약금 일부를 쪼개 아카시에게 줄 선물을 사서 남몰래 그의 신발장에 넣었다. 그 뒤로 시리즈의 인세가 들어올 때마다 같은 행동을 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일방적인 모델료였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가격대도 브랜드도 만만한 것을 고를 수는 없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부잣집 아가씨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니 어쩌면 전화위복일지도 모른다.


"최근 몇 개월간 멋대로 내 신발장에 손수건이나 장갑 같은 걸 넣어놓고 갔던 게 후지사키 상이 맞다는 이야기네."


거기까지 라이무의 장황한 사정 설명을 들은 아카시가 깔끔하게 핵심을 정리했다.


"녜……."


한참 횡설수설하던 라이무는 아주 작게 쪼그라들었다. 손수건이며 장갑이며 백화점을 한참 돌아서 골랐던 것도 그걸 편지 한 장 없이 아카시의 신발장에 넣었던 것도 전부 멋대로였던 건 사실이니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가장 멋대로였던 것은 그를 소설 주인공의 모델로 써버린 점이니 그야말로 죄인이었다.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의 소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라이무를 보며 아카시가 쿡쿡 작게 웃었다.


"재미있네."


별로 화가 난 것 같은 어조는 아니었지만 죄인은 더욱더 쪼그라들었다. 작년에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던 농구부원에게 어렵사리 들었던 바에 따르면 아카시가 잘못을 지적할 때 그다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농구부에서의 아카시는 평상시의 아카시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무섭다고 했다. 선천적으로 겁이 많은 라이무는 더이상 겁을 먹을 수도 없을만큼 쫄아있었다.


본인에게 들킬 줄 알았더라면 절대 그렇게 대놓고 프로필을 빼 오지는 않았을 텐데. 판매량도 그럭저럭인 수준이고 딱히 입소문을 탄 것도 아닌 삼류 라이트노벨을 대체 그가 어떻게 읽은 걸까. 그보다 자신이 쓴 건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필명을 애너그램으로 정하는 게 아니었나. 후기에서 교토에 산다고 입도 뻥끗하지 말 걸 그랬나. 갖은 후회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얌전히 판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아프지 않게 처형해줬으면 좋겠다…까지 뻗어 나갔던 생각을 멈춘 것은 아카시의 목소리였다.


"후지사키 상."

"네, 네, 넵!"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대답할 건 없는데. 편하게 앉아도 된다니까."

"저, 저는 이것이 편하옵니다!"

"무릎에 안 좋지 않을까?"

"괘, 괜찮습니다! 어차피 쓸모없으니까!"


사자 앞의 햄스터 같은 모습을 하고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는 라이무를 보고 아카시가 곤란한 듯이 웃었다. 딱히 추궁할 생각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이런 상태로는 대화라고 할 만한 걸 지속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전환할 것이 필요했다.


"음, 후지사키 상. 우선 뭔가 마실래? 차라든가…."


아카시가 그렇게 말하면서 학생회실 구석에 마련된 티포트를 돌아본 순간 라이무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 오겠슴다!!"

"응? 아."


그렇게 외친 그녀가 소파 밑에 얌전히 벗어두었던 실내화도 신지 않은 채 학생회실을 뛰쳐나간 것은 천하의 아카시 세이쥬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디!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다른 게 좋으시다면 새로 뽑아오겠습니다!"

"……."


라이무가 근처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를 품에 한가득 안고 돌아와 아카시의 앞에 조공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름: 후지사키 라이무

나이: 16세

생일: 8월 31일

키: 153cm

소속 부서: 없음

이상형: 카제하야

싫어하는 것: 공포영화


來夢이라고 쓰고 라이무라고 읽습니다. 아오사키 유고 <도서관의 살인>에 잠깐 스쳐지나가는 여자애기 이름이었는데 귀여워서 따왔어요. 어릴 때 이름 때문에 놀림 받아서 라임은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