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그 외

[이영싫/드림/귀능] 직장 선배의 유혹

양철인간 2017. 10. 13. 00:57

*평일 드림 전력

*주제: 나로는 부족해?

*이런 영웅은 싫어! 귀능 드림





직장 선배의 유혹





세상에는 몇 가지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


예를 들면 지구가 돈다는 사실, 지구의 자전 덕에 밤이 지나가면 아침이 온다는 사실,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서장님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는 사실.


그렇다. 이것만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할 리 없는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다. 연금술사들은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서장님이 진리 그 자체니까.


"서장님 오늘도 너무 멋있으세요…."

"오냐."


매일매일 내 신심 넘치는 신앙고백에도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시는 서장님은 하루하루 더 멋있는 광채를 더해간다.


서장님의 멋있음이란 거칠게 피로회복제 병나발을 들이키며 죽상이 된 얼굴로 서류만 들여다보아도 타고난 야생적임이 감춰지지 않는 멋있음이었다.


방금 지나간 구급차 봤어? 서장님의 멋있음에 기절한 내 영혼이 타고 있어….


취직이 되지 않아 빌빌거리다가 스폰서 연줄을 타고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싸가지 없는 손자놈 달래가며 몇 년을 붙잡고 있길 잘했어. 서장님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니.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를 처리하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서장님을 한 번 보면 된다. 그러면 개안하니까. 자린고비도 인공눈물 값은 아낄 수 없었을 텐데 서장님이 있으면 아낄 수 있단 말이야. 참 대단해. 이런 사원 복지가 또 어딨겠어.


"뀨."


그런 의미에서 복지 혜택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일거리 한 번 서장님 한 번 보기를 반복하고 있던 나를 방해한 것은 귀능 선배의 손바닥이었다. 불쑥 시야에 난입한 커다란 손바닥은 몇 번이나 피해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고 서장님의 후광으로부터 나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아, 왜요?"


이 선배가 왜 또 심술이람.


저번에 이상한 동물귀 달린 후드티 입어달라는 걸 거절해서 아직도 삐쳤나? 덩치는 산만하면서 속이 왜 그렇게 좁대.


"일 안 하고 서장님만 봐요? 월급루팡."

"열심히 하고 있었거든요."


오늘만 해도 벌써 한참 열심히 일해서 귀능 선배가 갑자기 맡긴 일의 반을 끝내가던 참이다. 불만스럽게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지만 귀능 선배는 여전히 손도 치우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 안 돼. 더 열심히 해야죠. 우리 회사 유일의 사무직인데."

"혹시 여기에선 사무직이라는 말이 노예라는 말하고 같은 뜻이에요?"

"아니요! 전직원이랑 같은 뜻이에요."

"진짜 싫다 이 회사…."


조금 전에 한 말 취소해도 됩니까? 경력 쌓고 이직할래요. 히어로 사이에서 서류일만 한 사무직 경력을 어디서 쳐줄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 서장님도 평소에 아무리 멋져 보여봤자 간부진들 사이에 가면 사회생활의 노예…"


묻지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던 귀능 선배가 갑자기 뒤통수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뭐예요, 저격?! 귀능 선배 죽어요? 갑자기 느와르물?"

"아, 아니거든요…."


귀능 선배가 눈물 고인 눈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가리켰다. 서장님이 아까까지 마시고 계시던 피로회복제 뚜껑이었다.


"아."


움찔 하며 돌아본 곳에서 서장님이 흉흉하게 눈을 빛내고 계셨다.


서장님, 멋있지만 무서워…!


"떠들지 말고 일해라."

"네……."


머리에 혹을 단 귀능 선배와 나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동안 우리 사무실에는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그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귀능 선배에게 온 연락이었다. 전화를 받고 온 귀능 선배가 서장님에게 간부 모님의 이야기를 전했다. 서장님은 짜증을 내면서 다녀오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세요…."


과연. 서장님도 사회생활의 노예라는 건 이런 뜻이었군.


분노만이 남아있는 서장님의 빈자리를 보다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한 직원 복지 혜택에 사라져버리다니 이렇게 허전할 수가. 심지어 중간부터는 귀능 선배 때문에 서장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귀능 선배가 나빴다. 다 귀능 선배 탓이다.


속으로 귀능 선배의 흉을 보고 있던 사이 탕비실에 갔다 돌아온 귀능 선배가 사무실 가운데의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불렀다.


"이리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해요."

"고맙습니다."


이런 걸 생색내지 않고 챙겨주는 건 고맙고 좋지만….


"대나무는 그만 주세요."


대나무는 하나도 안 고마워.


대나무가 담긴 그릇을 귀능 선배 앞으로 다시 밀어놓자 귀능 선배가 귀여운 척 입을 삐죽거렸다.


"선배의 특별 서비스인데 거절이 너무 매몰차네요."

"저 이 나가면 귀능 선배가 임플란트 해주시게요?"


아무리 귀능 선배라도 통장의 존재 위기를 두고 뻔뻔하게 굴 순 없는지 조용해졌다. 다행이야. 아무리 남의 돈이라도 이 나이에 임플란트를 하고 싶진 않다.


조용히 대나무를 입에 넣는 귀능 선배를 구경하면서 찻잔을 비우고 나니 잠깐의 휴식도 끝나 다시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 서장님도 안 계신데 일할 의욕 안 생긴다."

"뀨잉."

"이게 다 귀능 선배 탓이에요. 서장님 얼굴도 못 보게 하고. 유일한 직원 복지 혜택을 방해하다니 악덕 선배."


빈 찻잔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리자 귀능 선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유일한 직원 복지라니…서장님이요?"

"네."

"…!"


그냥 해본 말인데 귀능 선배가 왜 충격받은 얼굴을 하시는지…. 귀능 선배가 사실 직원 복지에 힘써왔는데 내가 무시했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귀능 선배가 갑자기 물어왔다.


"나, 나는요?"

"네?"

"나로는 부족해요?"

"…네?"

"서장님이 유일하다니…."


뭘 물어보고 있는 거야 이 사람.


"스푼 제일의 귀염둥이 마스코트인 내가 있는데!"


…제정신으로 뻔뻔하게 잘도 말하네!


"서장님은…서장님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알아요."


오수 씨잖아. 저번에 봤다. 부끄러워하는 서장님도 멋있었다.


"여자고!"

"모를 리가 없잖아요."


여자인데 그렇게 멋있으니까 더블로 멋있는 거라고요.


"성질도 더럽고!"

"음."


거기까진 내가 뭐라 첨언할 수 없다. 일단 동의는 하지만.


"돈도 없고! 그리고…아니 그야 멋있긴 하지만…나도 어릴 땐 서장님이 세상에서 제일 세고 멋있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어머님이…."

"거기까지 궁금하지 않아요…."

"윽."


귀능 선배는 어쩐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끊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몇 번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봐요, 난 이렇게 귀엽고 힘도 적당히 세고 신기한 특기도 있고 팬더고 섬세하고 그리고 또…."

"……?"


상사 비방에 이은 자기 자랑? 뭐지? 저도의 자기 과시?


내가 자기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몇 가지 안 되는 장점을 덧붙이던 귀능 선배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났지만, 마주친 시선이 붙잡힌 것 같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이렇게 차도 챙겨주고, 엄청 잘할 자신도 있는데."

"…네?"


귀능 선배의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 아래로 까만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그래도 나로는 부족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