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흑심만만 큐피드
*드림 전력 60분
*주제: 흑심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오레시) 드림
흑심만만 큐피드
내 생각에, 미부치 레오는 같은 부의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흑심이 있다.
여기서 '흑심'은 연심이라든가 연애감정이라든가 뭐 그런 귀여운 단어로 바꿔 써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사춘기 인간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흑심과 크게 차이도 없는 법이니까. 편의상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를 썼을 뿐이다.
아무튼, 내 생각에 미부치는 아카시에게 대단히 심도 깊은 호감이 있다. 일단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별이기는 하지만 뭐 딱히 그게 어쨌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남이 남자를 좋아하건 여자를 좋아하건 그다지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미부치는 2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는데 그 동안 딱히 본인 성향을 숨긴 적도 없이 늘 당당한 언니 말투로 여자애들 사이에 끼곤 하는 애였고, 아카시는 미부치 외에도 많은 여학생들 사이에 이름이 오가는 남자애였으니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아카시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는 만큼 딱히 아무 생각도 없으니 미부치가 그 애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 없는 일이다.
"세이쨩은 말이지, 연하인데도 정말 늘 든든하다니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저번 주 쯤부터 미부치가 나에게 어째서인지 아카시에 관해 연애 상담 비슷한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어, 응…."
가까이에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남자애의 칭찬을 열성적으로 쏟아내는 상대에게 해줄 말은 그다지 없다. 내가 아카시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거의 미부치를 통해 들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대부분 듣자마자 잊어버렸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미부치랑 친하긴 하지만 이런 얘긴 안 했으면 좋겠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카시 군은 1학년 때부터 농구부 부장에 학생회장이었으니까 대단하겠지."
나름대로 영혼을 담은 대답에도 미부치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정말,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구."
한숨을 섞은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은 내가 남의 연애 상담을 해준 적이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 무슨 얘긴데?"
"그…아니야."
미부치도 아차 싶은 얼굴로 말을 돌리는 것을 보면.
"휴우. 이런 얘긴 너무 어렵네."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리는 김에 내가 좋은 연애 상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세이쨩이 농구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던가?"
음, 전혀 모르는 것 같군.
"응. 농구 잘 모르니까…."
저번 주 쯤에 친구의 동생이 이번에 농구부에 입부해 처음으로 연습 시합에 나간다기에 보러간 적은 한 번 있지만, 2군 시합이라 아카시는 나오지 않았다.
"저번엔 보러 왔었잖아?"
"친구 동생이 연습 시합에 나온대서 같이 응원하러 갔던 거야. 나랑도 아는 사이거든. 그런데 보러 간 건 어떻게 알았어? 보여?"
"뭐, 관중석은 자주 보게 되어 있으니까. 세이쨩도…앗."
"왜?"
"아니야. 말실수."
미부치는 손을 한 번 내젓고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말을 건넸다.
"그럼 다음에 1군 연습 시합 보러 올래? 이번 주 금요일에 있거든."
"어…."
농구에 대해서는 공을 든 채 세 걸음 걸으면 안 된다는 것밖에 모르는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제안이다.
"아니…권유는 고맙지만 부활동도 있고 무리일 것 같은데."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미부치가 산뜻하게 포기해줘서 다행이었다.
사랑은 마음 속으로 응원할 테니 상담은 적당히 다른 사람에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랐던 것이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돌아온 금요일, 부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미부치에게서 온 라인을 발견했다. 부활동이 시작하기 조금 전에 보낸 것 같았다.
미부치 레오
[미안한데 부탁하나 해도 돼?] 오후 3:56
[파우치를 교실에 두고온 것 같아] 오후 3:57
[체육관으로 가져다줄 수 있을까?] 오후 3:57
부활 중에는 핸드폰을 보지 않으니까 몰랐다.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선 교실에 들러 미부치의 책상 서랍을 확인해 파우치를 찾았다.
언제인가 같은 농구부 부원이 쏟아버린 바람에 들고 다니게 되었다는 헤어 에센스나 운동 후에 뿌리는 데오드란트, 기초 화장품, 선블록과 립밤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미부치의 파우치는 제법 무겁다. 미부치의 말로는 분신 같은 물건이라 작년부터 단 한 번도 잊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미부치의 파우치와 가방을 든 채 농구부가 연습하는 체육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농구부 사람에게 부탁하고 집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도착한 체육관에는 어째서인지 구경꾼이 꽤 많았다.
"어?"
웬 일이지. 슬쩍 사람들 사이로 섞이며 안을 살펴보니 농구 코트가 북적이고 있다.
맞아. 오늘은 연습 시합이 있는 날이라고 했던가. 미부치도 그래서 정신이 없었나보다.
이해는 되었지만 이렇게 되면 농구부의 누군가에게 파우치를 맡기고 가는 건 무리다. 시합을 방해할 수도 없고.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라 한숨을 쉬며 얌전히 파우치를 끌어안은 채 2층에서 연습 시합을 구경했다.
두 번째로 보는 실물 농구는 저번 시합과는 박력의 차원이 달랐다. 농구는 전혀 모르는 나라도 2군과 레귤러의 실력 차이가 굉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대단하다는 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말로만 들어서 과장된 줄 알았던 아카시의 존재감이 너무 대단해서 놀랐다. 미부치가 끝도 없이 대단하다고 칭찬할 만도 했다.
파우치를 끌어안은 채 신기한 연습 시합을 구경한 지 몇 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는 우리 학교 농구부의 승리로 끝났다. 부활동이 끝난 후에 왔으니 연습 시합도 끝물이었나보다.
모여서 인사 하고 해산하는 농구부원들을 구경하다가 미부치와 눈이 마주쳤다. 안고 있던 파우치를 들어올려 보여주자 미부치는 안심한 듯이 웃었다.
"고마워! 정말, 곧 연습이 시작인데 파우치가 없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지 뭐야."
"미부치가 파우치를 잊어버리다니 별일이 다 있네."
연습 시합 상대였던 팀이 돌아가고 1학년으로 보이는 농구부원들이 체육관을 정리하는 사이, 미부치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미부치의 파우치를 끌어안은 채 체육관 문 옆에 홀로 멀뚱멀뚱 서있었다.
"……."
집에 가고 싶다.
왠지 나를 힐끔거리는 농구부원들 사이에서 하염 없이 미부치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 아, 안녕하세요…."
조금 전까지 대활약을 하고 있었던 농구부 부장 아카시였다. 먼발치에서나 봤던 하얀 얼굴이 바로 근처에서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는 바람에 조금 놀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안 가고 계속 있는 게 거슬렸나보다. 태생은 도쿄라고 들었는데 우아하게 돌려 말하는 솜씨가 교토 사람 수준인걸.
"아, 미부치 군이 교실에 놓고간 물건을 전해달라고 해서 왔는데 안 나오네요…하하."
어색하게 웃으면서 품에 안고 있던 미부치의 파우치를 보여주었다. 아카시는 그것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약간 돌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부치…쓸데없는 짓을."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미부치가 피부나 머릿결 관리를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운동부 남자애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 것치곤 본인 피부가 너무 뽀얗고 좋아보이지만…본인은 타고 나서 이해를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부러워 죽겠네.
"선배."
어째서인지 내 옆에서 자리를 뜨지 않는 아카시와 미부치가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 힐끔거리고 있자니 아카시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응?"
"제가 대신 전해드릴 테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시간도 늦었으니."
아카시가 잘생긴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건…눈에 거슬리니까 얼른 꺼지라는 뜻인가?
"아니에요."
…저 지금 소리 내서 말했던가요?
"표정이 알기 쉬우셔서."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 무심코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지만 그런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 고맙긴 한데…."
괜찮을까. 아카시에게 덥썩 맡겨버려도. 좋아하는 남자에게 잊고 온 파우치를 건네 받는 심정…잘 모르겠어.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어서 좋은 건가?
"괜찮을 거예요. 이미 목적은 달성했을 테니까."
"…?"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카시가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에 얌전히 파우치를 맡기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왠지 아카시가 나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오게 된 것은 바로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였다.
"들어드릴까요?"
수업 시간에 존 벌로 심부름을 떠맡은 쉬는 시간.
"옆에 앉아도 될까요?"
친구가 결석하는 바람에 혼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던 점심 시간.
"도와드릴까요?"
숙제를 까먹은 덕분에 낑낑 대며 프린트와 사투를 벌이던 방과 후.
그리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몸이 좋지 않아 오후 수업도 전부 빠지고 보건실에 누워있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난 바로 지금.
"어, 아카시 군. 어떻게 왔어?"
"안녕하세요."
침대 커튼을 걷고 다가오는 아카시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자, 아카시가 언제나 그렇듯 예의바른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미부치에게 선배가 오늘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어서."
"미부치한테…?"
그러고 보니 아까 미부치한테 내 가방 배달해 준다고 메일 왔는데.
"네. 선배 가방은 여기."
"…?"
내 가방이 왜 거기서 나와?
아카시가 내미는 가방을 들며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어지간히 멍청한 표정을 지었는지, 아카시는 나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미부치 씨에게 부탁 받았어요. 대신 전해달라고."
"미부치가…?"
오늘 따라 내내 물음표만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인가.
"네. 그리고 이왕이면 선배를 바래다 주는 것까지."
"왜?"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머릿 속이 온통 물음표 투성이다.
정말 왜죠.
본인이 좋아하는 남자애라고 다른 사람도 다 좋아할 줄 알았으면 정말 큰 착각이야, 미부치. 물론 몇 번 이야기했을 뿐인 여자 선배를 걱정해주는 걸 보면 아카시 군은 착하고 좋은 애인 것 같긴 하지만…아니, 그게 더 문제 아니야? 그러다가 내가 라이벌이 되어버리면 어쩌려고.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요. 혹시 모르니까 근처까지 바래다드릴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미부치가 왜 아카시 군한테 그런 부탁을…?"
"글쎄요."
내 물음에 아카시는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흑심이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아닐까요."
"흑심?"
미부치가 아카시에게? 그건 설명이 안 되는데….
"아니요."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아카시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 뒤이어 아주 자연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선배에게,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