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쿠로바스: 필승! 아카시군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이 가챠가 네 가챠냐

양철인간 2017. 8. 21. 00:04

*전력 드림 60분

*주제: 이벤트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보쿠시) 드림

*시리즈 5편





이 가챠가 네 가챠냐





나는 기본적으로 답이 없는 오타쿠지만, 게임에 있어서는 딱 한 가지 절대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다.


바로 가챠 게임에는 과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게임이건 상관 없다. 아이돌을 뽑건 왕자를 뽑건 서번트를 뽑건, 아무튼 간에 가챠를 뽑기 위해 하는 게임에는 절대 과금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어겨본 적은 처음으로 가챠 게임을 시작했을 때 호기심으로 소액을 질러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없다.


최애 오성을 얻기 위해 n백만엔 가챠 방송을 하는 일도 그걸 시청하는 일도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이런 신조를 정한 데에 그다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도박에 가까운 것에 돈을 쏟아붓는 일은 미래를 위해서도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첫번째.


두 번째로는 내 가챠운이 한도 끝도 없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운이 나쁜 것은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운이 나쁘다. 상점가의 뽑기에서도 참가상 티슈 외에 무언가를 뽑아본 적이 없고, 새해에 보는 운세는 늘 대흉. 객관식 시험 문제를 번호 하나로 몰아 찍어도 귀신처럼 답을 비껴가는 확률이 100퍼센트. 거기에 하다못해 아이스크림에서도 '하나 더'가 나와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느 장르의 모 캐릭터처럼 행운 랭크가 극단적으로 낮은 것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으로 소소하게 운이 나쁘다. 가챠 게임에서 최애를 뽑는 것은 언감생심. 과금만 하지 않을 뿐이지 무과금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가다를 다 뛰어서 얻는 가챠권으로도 늘 3성(중복)을 뽑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도 늘 통상은 열심히 뛰어서 얻을 수 있을만큼 전부 얻었고, 한정에는 미련을 버리면 그럭저럭 게임은 재밌게 할 수 있다. 애초에 재미 없는 게임은 답이 없으니 제외하고.


아무튼, 나는 내 게임 인생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누구나가 한정 5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하면 괜찮은 문제다. 일종의 물욕에 대한 통제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정 5성에 관해 해탈에 가까운 자세로 살아온 지 수 년.


드디어 위기를 맞았다.


열심히 하던 게임에 본진 장르 콜라보 이벤트 소식이 뜨고 만 것이다.


큰일이었다.


내 최애는 한정 5성이었다.


정말 큰일이었다.


카드가 너무 예뻤다.


진짜 엄청나게 큰일이었다.


한정 5성에 물욕을 버리라고 한 거 누구야. 손 들어서 뺨 때려. 앗 아프다.


쓰지 않고 모아둔 가챠 티켓이 있긴 하지만 그 안에 한정 5성이 나올 확률은 한없이 낮다. 하지만 역시 과금을 해봤자 한정 5성이 나올 확률이 높아지진 않는다.


"으어어…."


내 가챠운에 대한 주제파악을 지나치게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는 딜레마였다. 하다못해 그동안 5성을 뽑아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눈 딱 감고 조금은 과금을 해봤을지도 모르지만….


나올 리가 없어.


하지만 갖고 싶다.


갖고 싶다고 다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역시 갖고 싶다.


이벤트를 시작하고 며칠은 내내 그런 번뇌의 소용돌이였다. 물론 그 사이에도 착실히 플레이는 해서 통상은 거의 다 모았다. 오타쿠로서 당연한 소양이었다.


있는 가챠 티켓을 돌려봤지만 당연하게도 3성 파티였기 때문에 한층 더 번뇌에 휩싸였다.


누군가 가챠의 신에게 버림 받은 오타쿠를 구해줄 사람은 없는 것인가.


누구라도 좋으니까 도와줘. 최애 뽑게 해주면 신으로 모실게. 가챠신님 딱 한 번만 도와주십쇼.


"뭘 하고 있어."


마지막 한 장 남은 가챠 티켓을 보며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던 나를 부른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아, 아카시 군."


내가 화들짝 놀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 며칠 좀 피해다니려고 노력했기도 하고……아니 분명히 말해서 이건 아카시 탓이니까. 내 잘못이 아니다.


어딘가 몸 안쪽이 근질거리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아카시가 내 옆에 와서 앉는 쪽이 빨랐다.


"오늘도 게임?"

"어, 응…."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 그런…아니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순정만화에나 어쩌다 한 번 나올 것 같은 짓을 해놓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건가. 혹시 요 며칠 내가 피해다니던 것도 몰랐나. 하긴 이제 곧 시험기간이고…신경 쓸 틈이 없을지도. 좀 미묘한 기분이지만 굳이 내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다. 손등을 긁으며 아카시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엉덩이를 슬쩍 옮겼다.


"저번에 하던 것과는 다른 거야?"

"전혀 다르지…피카츄랑 메리프 정도로 다르다고나 할까."

"청자가 이해할 수 없는 비유를 드는 건 좋은 화법이라고 할 수 없겠는데."


뭐래냐 중2병 리얼충 걸어다니는 모순형용아.


"모르는 게 뭐야. 피카츄? 메리프? 다른 거? 전기 포켓몬?"

"'다른 거' 빼고 전부."

"…아카시 군 너 혹시 지구인 아닌 거 아니야?"

"실례네."


아니 어떻게 포켓몬을 모르는 인류가 존재할 수 있지? 우리 할머니도 피카츄는 안다.


내가 경악하는 사이 아카시가 내 손에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본인 걸 내가 맡아두고 있는 거였는지 착각할 뻔했다.


"게임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카시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글자를 주의깊게 읽었다. 오타쿠 일러스트랑 텍스트 좀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말아줄래.


"콜라보 이벤트가…최애가 한정 5성으로 나오는 바람에. 연챠를 돌려도 3성 밖에 안 나와서 어쩔까 생각 중이었어. 과금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티켓도 한 장 밖에 안 남았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게임 용어에 아카시는 드물게도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을 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 없다.


"뭐 리얼충은 이해 못하는 고민이니까 내버려둬…."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아카시가 예전에 내가 고전하던 모 미연시의 엔딩을 대신 봐줬던 것을 떠올렸다. 그건 우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카시는 왠지 운도 좋을 것 같다. 최애 한정 5성은 아니라도 평범하게 다른 5성 정도는 뽑아줄 것 같다.


"아카시 군. 부탁이 있는데."


거기에 생각이 미친 나는 아카시의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아카시의 손에 아직까지 들려 있는 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눌렀다. 


"…무슨 부탁을 말하는 거야."

"나 대신 가챠 좀 돌려주라. 왠지 너라면 5성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아. 내 최애 뽑아주면 더 좋고."


아카시는 여전히 리얼충답게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를 이렇게 눌러봐."


아카시의 엄지를 잡아서 화면의 중간으로 옮겨주었다. 아카시가 내쉰 한숨 같은 것이 뺨을 스쳤다.


"이걸?"

"응. 믿는다."


아카시가 화면 중간의 가챠 버튼을 꾹 눌렀다.


다음 순간 나는 최애 5성과 감격적인 상봉을 할 수 있었다.


"헉."


잠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원하던 게 이거야?"


5초 뒤에야 아카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원했다마다. 인생 신조도 바꿀 뻔했는데.


나는 스마트폰을 경건하게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아카시를 향해 경배했다.


"아카신 님…!!!"


가챠의 신인가? 신의 아이인가? 신에게 사랑 받는 아카시인가? 아니 그냥 신인가?


"내가 데스 노트 갖게 되면 꼭 너 줄게. 신세계의 신은 너야."

"의미를 모르겠어."


아카시는 내 혼신의 힘을 다한 경배에도 미묘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다시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그렇게 기쁜 일이야?"

"농구로 치면 전국 우승한 느낌이랄까."

"글쎄. 그건 숨을 쉬는 것 같은 일이라서."

"그럼 복권 1등에 당첨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복권을 사본 적은 없지만 별로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아 예 그러십니까.


"아무튼 고마워! 진짜 좋다! 엄청 갖고 싶었거든. 내 전자 남친!"

"…헤에."


입이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막으며(별로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스마트폰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아카시는 별로 나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저기, 그거 내 건데."

"알고 있어."


알면 내놔라.


"그렇게 원하던 걸 이루게 된 게 내 덕인데, 뭔가 보답은?"

"……."


아카시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얄미운 웃는 얼굴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주제에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맛있는 거 사줄게."


마이우봉이라든가.


맛있는 거라고 했지 비싼 거라고 안 했다.


"그보다는."


내 시커먼 속셈을 알았는지 아카시가 내 옆으로 턱 손을 짚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흡."


가까이에서 봐도 흠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숨이 멎을 뻔했다.


"……."


아카시는 그 상태로 잠시 말이 없었다. 긴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지. 뭔가 좀 숨 쉬기 힘들어.


눈을 굴리고 있자니 이내 아카시가 피식 웃었다.


"잊어버리지 마."

"뭐, 뭐를?"


아카시는 대답하는 대신 내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스마트폰을 돌려주고는, 느릿느릿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주었다. 


"도망치지도 마."


손끝이 화끈거리고 덩달아 손등이 간지러워졌다. 거기에 닿았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것처럼.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며칠은 봐줬지만, 이 이상은 없어."

"…그."


피해다녔던 거 알고 있었구나.


괜히 서운했네…가 아니라. 아니, 딱히 서운했던 건 아니야. 그보다는 뭐랄까 좀 더 이렇게…음…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튼 서운했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뭔가 기대했던 것 같잖아.


"그리고."

"응?"


고민하던 사이 아카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가상 캐릭터라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불쾌해."

"…엥?"


그런 식으로…라니 무슨 소리…설마.


"…전자 남친?"


확인 차 묻자 아카시의 반듯한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아니 진짜? 설마 진짜로? 그거 말하지 말라고 한 거야 지금?


"……."


화면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최애의 한정 5성과, 눈 앞에서 부루퉁하게 얼굴을 찡그린 두 살 연하의 남학생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내 전자 남친을 전자 남친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


내 말에 아카시는 미간의 주름을 한층 더 깊게 했다.


아무래도 정말 내가 이상해진 게 틀림 없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불렀다간 게임이라도 용서 안 해."


기분 나빠 하면서 중2병 대사를 내뱉는 아카시가 어딘가 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