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비 오는 날 사람을 줍지 마세요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보쿠시) 드림
*연상 드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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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사람을 줍지 마세요
"헤어지자."
3개월 정도 만났던 남자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사람이 없는 점심 시간의 학교 옥상이었다. 얼마 전부터 영 태도가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같은 부의 1학년 여자애가 좋아져서 이제 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든가 내가 별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든가 변명인지 뭔지 모를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구남친이 된 남자는 석연치 않은 듯한 얼굴로 옥상을 내려갔다.
나는 구남친의 모습이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갔어."
그늘 뒷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물론 이 학교엔 1학년 학생 회장이자 농구부 주장인 아카시를 모르는 사람 쪽이 더 드물겠지만, 내가 아카시를 알고 있는 건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아카시와 나의 위치를 바꾸기만 하면 지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몇 번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는 아카시를 다섯 번 정도 목격한 적이 있다. 일부러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근처에 고백하는 여자아이와 적절히 예의 바른 태도로 고백을 거절하는 아카시가 있는 일이 잦았다.
대단히 낙심해서 가버리는 여자아이를 몇 번이나 보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눈이 마주친 아카시에게 몇 번이나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도 물론 그랬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알아. 나도 늘 그랬거든."
오늘은 입장이 바뀌고 보니 꽤 신선한 느낌이다. 고백하는 장면과 차이는 장면은 꽤 느낌이 다른 것 같긴 하지만.
"평소엔 내가 자주 봤으니까 오늘 걸로 대충 퉁치자."
"괜찮으세요?"
그렇게 묻는 아카시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짐작은 했었으니까 뭐."
틈만 나면 고백 받는 남자애에게 차이는 장면을 목격 당하고 걱정 받는 건 꽤 이상한 기분이었다.
"당분간 좀 외롭긴 하겠네."
기지개를 켜면서 말하자 아카시는 양쪽의 색채가 다른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런가요?"
"있다가 없으면 보통 그렇지. 인기 있는 남자는 잘 모르나?"
"꼭 그렇진 않지만."
"나는 원래 좀 외로움을 잘 타기도 하고."
옥상 너머의 하늘을 보면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했다. 아카시는 친절하게도 내 말에 일일이 대꾸해주었다.
"아, 곧 종 치겠다."
옥상 계단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는데, 어깨 뒤쪽에서 넘어온 손이 먼저 손잡이를 잡았다. 아카시였다.
"선배."
귓바퀴의 뒤쪽에 친절한 듯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외로울 때는 불러도 돼."
뒤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그보다 눈앞의 문이 열리는 것이 빨랐다. 한 발 옆으로 비켜서 문이 닫히지 않게 막고 선 아카시가 먼저 내려가라고 눈짓했다.
"…고마워."
"천만에요."
간지러운 귓바퀴를 손으로 문질렀다. 혹시 잘못 들었나? 의심스러운 기분으로 아카시를 힐끔 올려다보았지만 언제나처럼 침착한 옆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그 근처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아카시 군?"
"선배."
부름에 돌아보는 하얀 얼굴이 물기에 젖어 빛난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비싸보이는 셔츠가 안타깝게도 비에 조금 젖어 있었다. 언제나 빈틈 없었던 평소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모습이다.
"혹시 우산 없어?"
"네.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분하게 대답하는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쥐고 있던 우산을 폈다. 한 발 밖으로 나서자 우산 위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시는 우산을 쓰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빗줄기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불러도 돼.'
귓바퀴가 간지럽다. 우산을 들지 않은 쪽 손으로 귀를 문질렀다.
"요 앞이 우리 집인데."
그런 말을 꺼냈던 것은 반쯤은 충동이었고 반쯤은 농담이었다.
"들렀다 갈래?"
그랬기 때문에 내 말에 망설임 없이 다가와 우산을 받아드는 아카시의 모습은 반쯤 놀라웠고 반쯤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편의점에서 우리 집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그동안 나와 아카시는 쓸모 없는 이야기를 몇 마디 했다. 그동안 나는 오늘은 농구부 연습이 쉬는 날이라든가 오늘 비가 올 확률은 20퍼센트 이하였다든가, 아카시는 오늘 별장에 들러서 유키마루라는 이름의 자기 말을 타고 시내의 서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든가 하는 사실을 알았다.
자기 말이 있구나. 그렇군. 잘 어울린다.
"말은 하얀색?"
"맞아요."
"엄청 잘 어울리네."
"그런가요?"
예로부터 왕자님은 늘 백마를 타고 다닌다고들 했다. 라쿠잔 여학생들 사이에선 거의 왕자급으로 통하는 아카시인만큼 이미지적으로 훌륭하게 잘 맞는다. 승마복 차림의 아카시가 백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들어와."
집에 도착해서 마른 수건을 건네자 아카시는 그것으로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 녹차와 홍차 중에 어떤 티백이 좋을까 생각하고 있다가, 수건을 젖은 어깨 위로 올려 툭툭 털어내는 아카시를 보았다.
"옷 빌려줄까?"
"아니."
짧게 대답하며 다가온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아랫입술을 아주 살짝 물고 다시 간격을 벌렸다.
"그동안 마를 테니까,"
아카시는 셔츠의 단추를 풀며 다시 다가왔다.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아직 물기가 남은 앞머리가 이마에 닿았다.
"응."
"…괜찮아."
셔츠와 수건이 소파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아직 차가운 손끝이 뒷목에 닿았다가 천천히 어깨로 내려왔다. 민소매 원피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쩐지 서툰 듯한 키스였다.
(삭제 부분)
그 날 밤 조금 구겨진 채로 그럭저럭 마른 옷을 입고 돌아갔던 아카시는 다음 날 깔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체육 시간에도 멀쩡히 잘 뛰어다니는 것 같다. 창문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니 다행히 감기 같은 것은 안 걸린 모양이라 조금 안심했다. 아프기라도 했다면 내 양심이 너무 아팠을 것 같거든….
만약에 아팠다면, 글쎄…가능한 한 앞으로 얼굴 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으니 어떻게 약을 전해줄 수도 없고….
역시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평범한 선후배 사이로 남았더라면 비 맞고 들어갔는데 괜찮냐 걱정 정도는 했겠지만, 역시 어색하고…굳이 더 질척거려서 후환을 남기느니 이쯤에서 모른 척 하는 게 맞겠지. 아무리 여자에 익숙해보여도 1학년 짜리랑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장 너머에서 아카시가 골을 넣는 모습이 보였다. 축구도 잘하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카시가 이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깜짝이야. 저기에서 이쪽을 보고 있을 리가 없는데. 보일 리가 없는데. 내 교실이 여기인지도 모를 텐데.
역시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운동장 쪽을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옥상에도 뒷뜰에도 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며칠 동안 아카시를 보지 않는 것은 쉬웠다.
오늘은 일주일만에 비가 오는 모양이다.
아까 샤워를 한 뒤부터 계속 이어폰을 끼고 있었던 탓에 빗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꽤 많이 오고 있는 듯했다. 딱히 밖에 나갈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창문의 커튼을 걷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내가 바깥의 날씨를 알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밖에 비 많이 오니?"
현관 앞에 서있는 후배가 물에 한 번 빠졌다가 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법."
센서등 아래에서도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가 폭삭 젖었다. 평온하게 대답하는 하얀 얼굴을 타고 밧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산이 없었어? …아카시 군."
"공교롭게도, 없네."
보통은 물에 빠진 생쥐라고 표현될 것 같은 상태도 아카시의 세련된 미소 아래에서는 볼썽 사나움을 잊는다. 물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며 옷도 어떤 연출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아직도 더운 늦여름이라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비에 젖으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을 리 없다. 원래부터 운동하는 남자애 치고는 놀랄만큼 하얀 피부가 한층 더 희게 보이는 것을 보고도 비가 오는 밖으로 쫓아낼 정도로 매정하게 굴지는 못했다.
"…일단 들어와."
한숨을 섞어 말하자 아카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마른 수건을 몇 장 가져다주자 곧장 비에 젖은 머리와 얼굴의 물기를 털어냈다. 푹 젖은 농구부 티셔츠 위에도 수건을 올려주었지만 역시 이런 것으로 물기를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추워?"
아, 괜히 물어봤다. 채 후회하기도 전에 아카시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키 자체는 작지만 단단하게 단련된 상체에 달라붙은 옷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를 대체 얼마나 꼼꼼하게도 맞았는지 도무지 우산만 빌려주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씻고 옷 갈아입고 있을래? 건조기 돌려줄 테니까."
"고마워."
아카시는 주저하지 않고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일전에도 그랬지만 도무지 사양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티셔츠와 반바지를 내어주고 욕실로 밀어넣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바닥에 똑똑 떨어진 물기를 닦아내고 현관에 놓인 가방을 집어들어 대충 물기를 닦고 마른 걸레 위에 올려놓았다. 신발…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놓아둘까. 씻고 나오면 뭔가 따뜻한 거라도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욕실 안에서 샤워기 소리가 난다.
저 애를 또 다시 집에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한숨을 내쉬면서 티백과 찻잔을 꺼냈다. 곧 욕실 문이 열리면서 아카시가 나왔다.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쓴 채였다.
"옷은 그 옆에 건조기에 넣어둬."
아카시는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젖은 체육복을 집어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뭐 마실래? 티백 뿐이지만."
"됐어."
"안 추워?"
젖은 수건 아래로 색채가 다른 두 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시선을 피하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 문제도 없어. 네가 피하지만 않는다면."
식탁 위로 내려놓은 손 위에 아카시의 손이 겹쳐 올려졌다. 손을 구속하듯이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아카시 군."
"피하지 마."
훅 샴푸 냄새가 가까워졌다. 피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었던 건 다가온 입술에 매달리듯 키스를 조르는 것뿐이었다.
(삭제 부분)
결국 아카시의 체육복을 건조할 수 있었던 건 그 뒤로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카시에게 반쯤 기대어 누운 채로 멍하니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창밖의 빗소리를 들었다.
"아카시 군. 저번에 빌려줬던 우산 다음에 가져와."
하긴 그건 거의 받을 생각도 없었다.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아, 정말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가져왔어."
"아, 그래? …어?"
"가방 안에."
아카시가 아무렇지 않게 현관 쪽을 곁눈질한다.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켜서 그쪽과 아카시를 번갈아 보았다.
"…있는데 왜 비 맞고 왔어?!"
"그래야 안에 들여보내줄 테니까."
아니 좀 피해다녔기로서니 뭘 그렇게까지…?
입을 뻐끔거리는 나를 보며 아카시가 눈을 좁혔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지더니, 냉랭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말한다.
"첫 경험의 상대가 갑자기 차가워져서 상처받는 게 꼭 여성에게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
"…어?"
그 말 꼭…아니 정말 되게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거…꼭 아카시 군이 처음이었다는 것처럼 들리네…?"
"정확하게 들었어."
농담이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 날이 처음이었어."
"……."
무슨 짓을 해버린 거지.
사고 기능이 정지해버린 것 같다.
두 살이나 어린 후배를 꼬셔서 하루만 자고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사실 걔가 알고 보니 동정이었다니 아니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그보다 얘는 좋다는 여자도 엄청 많았던 주제에 왜 아직까지 동정이었던 거야. 그런 주제에 왜 그날만 따라와서 왜….
충격으로 핏기가 없어졌을 것이 분명한 뺨에 아카시의 손가락이 닿았다. 엄지가 건조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참고로 얘기해두는데,"
"응?"
"나는 평소에 거의 늘 우산을 가지고 다녀."
어?
"그 날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뭐라고?
모양 좋은 입술이 미소를 띤 채 다가와, 이번에는 내가 채 그 말 뜻을 알아듣기도 전에 내 입술과 의문을 동시에 집어삼켰다.
"다시 도망치면 용서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아카시에게 거의 파묻히듯 안겨 있었다. 아카시는 빈틈도 없이 엉긴 몸을 놓아줄 생각도 없이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물론 정해져 있었다.
아카시는 결국 체육복이 다 마르고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두 번 다시 피해다니지 않겠다는 약속과 핸드폰 번호까지 받아내고서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기숙사로 돌아갔다.
"안녕, 아카시…군?!"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친 아카시는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다가와 매우 자연스럽게 내 이마에 입을 맞췄고…
"무, 뭐, 아니 이게 무슨…!"
"도망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이런 것도 포함이었어?!"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고백 장면을 목격해버리고 말았던 다섯 명의 여학생들을 포함한 교내의 수많은 학생들의 부러운 시선 집중포화를 받으며 퇴로를 완전 차단당하고 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