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쿠로코의 농구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아카시는 친구가 적다

양철인간 2017. 6. 4. 23:51

*전력 드림 60분

*주제: 걱정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 드림

*짧아요





아카시는 친구가 적다





신학기가 시작 된 어느 날, 학생회에 뉴페이스가 들어왔다.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1학년 신입생 학생회장이었다.


새 회장의 이름은 아카시 세이쥬로. 대단한 명문가의 외동 아드님으로 입학 시험은 만점이고 농구도 천재고 자격증이 200개고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뭐 그렇다던가 아니라던가. 대충 엄청난 소문들이 떠돌아다니지만 아무튼 잘생기고 똑똑하고 착한 부잣집 도련님인 건 내가 아주 잘 알겠다. 같은 학생회라서 얼굴을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런저런 소문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종종 학생회에서 아카시는 어떠냐고 물어오곤 하는데, 1학년인데 회장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명문가 자제분인 데에 비하면 제법 예의 바르고 친절한 후배라서 딱히 개인적인 불만은 없다. 농구부 일도 병행해야 해서 바쁠 텐데 늘 학생회 일에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니까, 오히려 따지자면 호감에 가까운 쪽 아닐까? 아카시가 회장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학생회를 그만 둔 사람도 몇 명 있는 걸 생각하면 미묘한 기분이지만.


어제도 학생회 회의를 마치고 가는 길에 '잘도 1학년 아래서 부회장 같은 걸 한다'며 빈정거리던 전 부회장을 생각하니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아니 지가 그만 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신지. 학생회에 아카시 하나만 남아야 만족할 건가. 착하고 성실한 애한테 왜 그래. 물론 잘생겨서 더 관대한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흥."

"왜 그래?"


혼자 투덜거리고 있자니 친구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바탕 전 부회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속으로 삼켰다.


"아니야, 아무것도. 5교시 뭐였지?"

"수학. 숙제 했어?"

"당연하지. …어?"


대답하면서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내려고 했지만 내 가방 안에는 노트가 없었다. 어제 분명히 챙겼는데? 회의 끝나고…아.


"학생회실에 놓고 왔나보다."


집에 가면 역시 놀기만 할 것 같아서 회의가 끝난 뒤 학생회실에서 전부 끝내놓고 가려고 했었다. 일단 숙제는 끝냈지만 노트는 두고왔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노트 찾으러 갔다 올게."


친구들에게 말해놓고 학생회실로 향했다. 어차피 아직 5교시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으니 느긋하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느릿느릿 걸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혼자 장기를 두고 있는 아카시였다.


"어,"


선명하게 눈에 띄는 빨간 머리를 보고 문가에 멈춰서자, 장기말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아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단정한 얼굴이 인사를 건넸다. 나는 잠시 멈췄던 발을 안으로 들여놓으며 아카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회장. 혼자 장기 두고 있어?"

"네. 시간이 남아서요."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답하는 얼굴은 언제 봐도 놀랄만큼 하얬다. 농구가 아무리 실내 스포츠라지만 운동하는 남자애 피부가 이렇게 하얘도 되는 건가. 왠지 좀 불공평한데.


"선배는 어쩐 일로?"

"아, 어제 노트를 두고 간 것 같아서…. 하던 거 계속해."


아카시는 어제 썼던 책상 근처를 뒤적거리는 나를 힐끗 보고 다시 본인의 장기판 위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실내엔 장기말이 달칵거리는 소리와 내가 노트를 찾아 책상을 뒤집어 엎는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아, 찾았다."


어쩐지. 회의록 사이에 끼어있었구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 노트와 숙제를 확인하고 교실로 돌아갈까 했다가, 그제야 혼자서 장기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카시가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아카시, 딱히 친구랑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두루두루 남들과 이야기는 잘 하는 것 같았는데 왜지. 친한 친구가 없나. 식당에서도 거의 늘 혼자였던 것 같고. 농구부 주전들과 같이 가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아무리 아카시가 주장이라도 보통 운동부 선배들을 친구라고 하진 않지.


"……."


진짜 친구 없나.


본인에게 물어보기도 왠지 좀 그런데. 상처일 것 같고.


나는 잠시 문가에 서서 아카시의 옆모습을 보다가, 결국 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회장, 장기 좋아해?"

"시간이 남을 땐 즐겨두는 편이에요."


빙 둘러 애매하기까지 한 답을 하는 아카시를 내려다보다가, 그 앞 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나랑 한 판 두자. 나 옛날에 할아버지랑 자주 뒀거든."

"할아버님과?"

"응. 살아계실 땐 엄청 자주."


아카시는 피식 웃더니 혼자 두고 있던 말을 정리해 내쪽으로 내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거 꽤 고급인 것 같은데. 범상치 않은 촉감이 느껴진다. 옥을 만지작거리면서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카시가 가볍게 말을 건네어 왔다.


"핸디캡 필요하세요?"

"음, 아니."


말 안 했냐. 우리 할아버지가 용왕이었다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장기는 끝나지 않았다. 예비종이 치는 바람에 놀라서 말을 하나 잘못 놓았으니 앞으로 다섯 수 안에 질 것 같긴 하지만. 이래서 내가 프로 기사가 못 된다니까. 반면에 당장 프로 장기 기사에 도전해도 될 것 같은 실력을 뽐낸 아카시는 아주 침착하게 장기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슬아슬 했는데 좀 아깝다.


"넌 장기도 잘 하네. 못 하는 게 뭐니?"


나는 딱히 승패에 집착하는 성미는 아니다. 이런 점을 할아버지는 아주 싫어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 있었고, 무엇보다 친구가 없어 보이는 아카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아니 뭐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카시도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잖아. 장기는 혼자보단 둘이 두는 게 재미있을 거고. 아마도.


"글쎄요. 없는 것 같은데."


겸손한 거랑 친구 사귀는 걸 못하는구나. 알겠어.


"이제 교실 가야겠다. 다음에 또 장기 둘 일 있으면 불러. 혼자보단 재밌을 거 아니야."


옆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집어들며 말하자, 아카시가 하얀 얼굴에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재미 있네."


이제까지와는 명백히 분위기가 다른 얼굴이었다.


"…회장?"


뭐지?


"재미 있었어, 부회장."

"……장기가?"


그렇게 안색 바뀔 정도로 재미 있었어?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내 말에 아카시는 다시 이상한 미소를 짓더니, 평균 정도인 키에 비해 긴 편인 다리로 훌쩍 다가와서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아니, 네가."


내가 흠칫 놀라는 사이, 아카시는 유유히 혼자 학생회실을 빠져나가버렸다.


…방금 거 대체 뭐였지? 장기 친구에게만 보여주는 인성 같은 거?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교실로 돌아와 같은 반 농구부원인 하야마에게 너네 농구부 주장 장기 엄청 좋아하는데 같이 둘 친구가 없는 것 같으니까 가끔은 같이 둬주라고 전해주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애가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


하야마가 그 이야기를 아카시에게 일러바쳤다가 '재미 있으니까 그냥 놓아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이로부터 한참 후의 이야기다.








일코하는 보쿠시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