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쿠로바스: 필승! 아카시군

[쿠로바스/드림/아카시 세이쥬로] 패배도 수치도 모르는 남자

양철인간 2017. 5. 30. 23:31

*평일 드림 전력

*주제: 떨리는 순간

*쿠로코의 농구 아카시 세이쥬로 드림

*시리즈물... 3편째...





패배도 수치도 모르는 남자





딱히 성적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세계사 시간이었다.


"아, 자네가…."


세계사 담당 교사이자 농구부 감독인 시로가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듣더니 오묘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한 10초 정도. 그 동안 숨을 못 쉬었다.


평범하게 밥을 먹으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저 사람이지?"

"아카시의…."

"주장이…."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실내 스포츠를 하는 게 분명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나를 힐끔힐끔 구경하면서 자기들끼리 다 들리는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하교 시간에 집에 가려던 길이었다.

"꺼어억."

신발장 앞에서 아마 주전이었던 것 같은 세 사람과 마주쳤다. 골목길에서 봤다면 울었을 것 같은 근육의 거인이 나를 구경하면서 엄청나게 트름했다. 그 옆에선 굉장한 속눈썹남이 나를 도그 콘테스트에 나간 스탠다드 푸들을 평가하는 듯한 눈으로 뜯어봤다. 덧니가 난 치타 같은 남자애는 진짜야 진짜? 하고 사람 심란하게 떠들어댔다.


원인은 누가봐도 농구부의 그 녀석이다.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길을 막고 뭘 하고 있어."

"오, 아카시!"


그래. 너 말이야.


"안녕."


내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게 인사해오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끔했다.


"…안녕, 아카시 군."

"하교 하려고?"

"그럼 등교하는 중이겠니…."


인사하는 사이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역시 원흉은 너지. 아카시를 조금 노려보며 슬쩍 옆으로 몇 발자국 움직여 부담스러운 갤러리들과의 사이에 아카시를 둔 위치로 물러나자, 아카시가 나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하는 덩치 큰 갤러리들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코타로, 그녀를 상대로 무례하게 굴지 마."


그렇다고 무례라니 네가 말할 단어였냐.


그 자리에서 항의하기엔 부담스러운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나는 아카시에게만 인사를 남기고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집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 내일 봐."


꼭 쓸데 없는 존못 플러팅을 붙이는 아카시에게서 멀어지는 사이, 등 뒤에서 '의외로 조용하다'든가 '의외로 숫기가 없다'든가 하는 말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약간 죽고 싶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한 얘기지만, 나는 딱히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타입의 캐릭터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외모는 수수하고 성격은 조용한 편인 데다 성적은 그냥저냥 중위권, 운동신경도 예체능에도 딱히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 하나 눈에 띌 구석이 없다. 존재감이 없는 것도 같은 반의 마유즈미 정도 레벨이 되면 농구에도 활용 가능한 특성이 될 수 있겠지만 또 그 정도까지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니라 거기까진 갈 수 없는 애매한 수준의 평범함이다. 


세상을 일종의 작품에 비유하자면 교실에서 주인공과 같은 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브 캐릭터로 인기투표에서 이상한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3표를 받곤 하는 존재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나는 태어나 이제까지 살며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일에 대한 경험치를 쌓아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가는 곳마다 모르는 사람들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상황에 우주 먼지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마유즈미 군, 어떻게 좀 해봐. 너 농구부잖아."


전생의 위장병이 다시 도질 것 같은 기분에 결국 나는 하룻밤을 고민한 끝에 내가 아는 단 둘 뿐인 농구부 관계자 중 원흉이 아닌 쪽에 컴플레인을 넣기로 했다. 마유즈미와는 같은 반에 안면이 있다고는 해도 둘 다 만성 사회성 부족으로 세상에 버려진 탓에 그다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잘못하다간 내가 죽어버린다고. 스트레스로.


"……."


가사 실습(3학년에게 용케도 이런 짓을 시키는군) 시간에 같은 조가 된 김에 용건을 건네자, 마유즈미는 잠깐 내 말을 듣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걸 나한테 말해도 의미 없어. 내가 아카시에게 뭐라고 말 할 입장도 아니고. 알지 않냐. 3학년이라도 나는 주전 중에선 피라미드 최하위라고. 우리 농구부는 실력 주의니까 다들 따로따로 놀고."

"진짜 이상한 학교네. 만화냐."

"너도 이상해. 오타쿠냐."


젠장.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쓸모 없을 줄이야. 3학년 주제에. 키만 멀대 같고 그림자 희미하고 농구만 희한하게 하면 다냐 오타쿠 자식.


"…너 지금 실례되는 생각 하지 않았냐?"

"아닌데."


사실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마유즈미는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 아무튼 진짜 죽겠으니까 농구부에서 체육대회 얘기를 아직까지 할 정도로 할 일 없으면 농구나 하라고 전해주고."

"할 일 없지 않거든. 곧 인터하이 결승리그고. …따지고 보면 네 자업자득이잖아."

"내가 뭘?"

"그렇게 공개적으로 아카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다니."


너네한테 아카시는 대체 뭐야.


"게다가 그런 짓을 해놓고도 아카시와 사이가 좋게 얘기하는 것도 목격 되니까 역시 사귀는 거 아닐까―라는 전개."

"……."


몇 단계를 건너 뛴 거냐. 농구부란 머릿속에 인간관계=연애관계 밖에 없는 사람들이신지. 순정만화 세계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인가. 그냥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가. 잘도 그런 결론이 나오네.


"설마 진짜 사귀냐? 비밀연애 같은 거? 출생의 비밀이 얽혀있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거든…."


넌 라노베 그만 봐라.


"그럼 무슨 사이인데?"

"음, 무슨 사이냐면…어…무슨 사이지?"

"나한테 물어서 어떡할 건데."


무슨 사이냐고 물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아는 선후배 사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아닌 것 같고, 딱히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 외엔 그 녀석이 일방적으로 넘어오라고 말하거나 내가 자길 좋아하게 될 거라고 말하거나…그런 게 전부인데.


어라?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나 좋아한다고는 말한 적 없지? 순 얼른 자기한테 반하라는 식의 말 뿐이었고.


으으음. 뭐지? 이걸 뭐라고 해야 되지?


…아니 그보다 이런 게 신경 쓰이는 시점이 보통 순정만화에선 플래그 꽂힌 시점 아닌가? 갑자기 숨겨진 약혼녀가 등장해서 질투하게 된다든가 뭐 그런 전개로. 현실에서 아마 그건 아니겠지만….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딱히 이것도 저것도 확실한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결국 나는 익숙한 비유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게임으로 치면 아직 호감도 시스템이 안 열린 상태?"

"뭔지 모르겠는데."


이런 라노베 밖에 모르는 시야 좁은 오타쿠놈.


"라이트노벨로 치면 인물 소개에 이름이랑 나이 밖에 없는 상태?"

"아하."


이런 비유법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되는 건 인간으로서 자격이 간당간당한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수업 종이 칠 때까지 내내 생각했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는 결론이었다. 아카시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직접 물어본다든가 그런 건 역시 선택지에 없다.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왠지 이런 걸 고민하는 것도 부끄럽긴 한데.


"으으윽."


재료를 자르다 말고 부끄러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 마유즈미가 한심하게 쳐다봤다.






어째서인지 3학년이 되어서까지 해야 했던 가사 실습이 끝난 뒤에는 바로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실습 시간에 만든 주먹밥(마유즈미와 머리를 맞대고 가장 쉬울 것 같은 메뉴를 선택함)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귀찮아서 실습실에서 죽을 뻔했지만 매점에 안 가도 된다는 정도의 장점은 있네. 다행이다. 좀 덥긴 하지만 식당까지 가고 싶지 않아. 사람이 많으니까. 평소에 자주 앉는 그늘진 자리에 앉아서 주먹밥을 하나 집어들었던 때에 옥상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역시 있었네."


불쑥 얼굴을 내민 것은 요즘 내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다.


"아카시."


으윽. 아카시 얼굴만 봐도 관심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시로가네 선생님이며 이름 모를 농구부원들이 생각나서 인상을 구겼지만 아카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내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오늘 실습 시간에 주먹밥 만들었다고 들었어."

"응."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다. 애초에 같은 조였던 마유즈미가 농구부, 본인피셜 주전 피라미드 최하위라고 했으니까.


"잘 만들었어?"

"글쎄다…."


어쨌든 사람이 못 먹을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안 먹어봐서 잘 모르겠다.


"먹어볼래?"


꽤 많이 만들긴 했으니까 하나 정도는 줄 수도 있다. 부잣집 도련님의 입맛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릎에 내려놓았던 개인 도시락통을 가리키자 아카시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도시락통을 통째로 가져갔다.


"어."

"나에게 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당연히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온 건데."


뭐지 이 뻔뻔함은? 맡겨 놨냐. 알고 보니 주먹밥 커미션이었냐.


"그거 내 점심이거든…."

"알고 있어."


그걸 아는 놈이?


채 항의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카시가 옆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도시락을 들어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광택부터 심상치 않은 보자기에는 근처의 유명한 고급 요리점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아니 이 더러운 부르주아 녀석이…


"교환하자."


나는 물론 군말 없이 이 유리한 불공정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마워, 아카시."

"그래."


평생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도시락을 얼른 열고 싶었지만 아까 먹으려고 꺼냈던 주먹밥이 아직 손 안에 있다. 어차피 한 입 크기로 만들었으니까 이걸 얼른 먹어 치우고―


"잘 먹을게."



아카시가 가볍게 내 손목을 잡았다. 시야에 훅 빨간 머리가 가까워졌다. 좋은 냄새…가 아니라.


어?

어어?


손가락 끝에 살짝 치아와 입술이 스치는 느낌이 났다.


"…?!"

"먹을 만해. 내 입맛에는 조금 더 싱거운 편이 좋겠지만."


고개를 든 아카시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놓고 주먹밥의 맛을 평했다.


"지금 뭐, 뭐, 뭐…."


말을 더듬는 나를 보며 아카시가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늘게 했다.


"곤란해 보이길래."


이게 더 곤란하거든?!


"안색이 굉장해졌는데."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냐. 아니 그보다 넌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아직도 13호 쿨톤인데. 너한텐 부끄러움이라는 것도 없니? 물론 없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가 높다는 말을 하는 173 농구부 주장이니까. 다른 농구부 애들은 주장이 안 부끄러운 걸까. 혹시 인터하이 농구부 출전 자격에 수치심이 없을 것이라는 항목이 있나.


"다음 주에는 인터하이 결승 리그가 열려."


생각을 읽힌 것처럼 타이밍에 맞춰 들려온 말에 깜짝 놀랐다.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도리어 의아해졌다.


"어? 아, 그래…?"

"보러 와."


그거 명령이냐.


"전에도 말했지만 난 응원 같은 거에 소질이 없다고…."

"응원은 필요 없어. 어차피 승리는 결정되어 있으니까. 내가 승리하는 걸 보러 오라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정말 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슬슬 열기가 식어가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얼른 돌려 받고 싶거든. 그 종이. 물론 말로 해도 좋지만."

"………."


진짜 순정만화 같은 소리 잘도 하네 이 자식…!!! 간신히 색을 되찾아가던 뺨에 다시 확 열기가 올랐다. 역시 이 녀석은 수치심이 없는 게 틀림 없다. 공감능력이 없어서인가? 대체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야.


나는 한참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간신히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았다.


"너는, 그러니까…그…."

"뜸 들이지 말고 말해."


그렇게 말해도, 역시 심장이 통제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나를 조, 조…."


내가 주전자였다면 끓어올라 삐 하는 소리가 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역시 안 되겠어.


"조…으으….너는 그, 나,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역시 그런 순정만화에서나 본 것 같은 말을 입에 담기는 너무 부끄럽다. 이것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카시는 잠깐 자기 머리색 만큼이나 새빨개졌을 것이 분명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전국대회에 우승하면 같이 말을 타러 갈 거야. 내 말 유키마루를 타도록 해. 교토로 올 때 함께 내려와서 근처 마장에 맡겨두었어. 아주 영리한 말이니까 너도 마음에 들 거야."

"……."

"그리고 가을이 되면 단풍을 보러 갈 예정이야. 좋은 장소를 알고 있으니까. 좋아하잖아, 그런 거."

"어, 응…."

"가을이 지나면 윈터컵이 있으니까 다시 연습이 바빠지겠지만 가끔은 집에 바래다 줄 수 있어."


도저히 눈 앞의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이야기에 더이상 달아오를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자꾸만 더 뜨거워졌다.


"만족해? 이런 건 이미 전부 정해져 있으니까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에게 패배 선언만 하면 돼."


아카시가 내 주먹밥을 입에 넣으면서 말을 맺었다. 무섭도록 뻔뻔한 옆얼굴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잠잠한 안색이었다.


"…그거 참 귀여운 예정이네."

"흐음."


나름대로 비꼬아봤지만, 아카시는 평소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 하고 싶은 건 아닌데, 듣고 싶어?"

"~~!!!"


넌 진짜 수치심이라는 게 없냐!! 한 개도 지질 않네!!


결국 나는 먹어본 적 없는 고급 도시락이고 뭐고 전부 버려둔 채 교실로 도망쳤다.


그러나 금세 뒤를 따라온 아카시가 내 책상 위에 도시락을 두고 가면서 '주먹밥 잘 먹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나의 해결 되지 않은 고민은 더욱 큰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저 사람이 주장의…맞지?"


역시 우주 먼지가 되고 싶다.


패배고 승리고 난 그런 거 몰라!


이게 다 그 수치를 모르는 그 녀석 때문이야!










이번에도... 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