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작업물

[하이큐/드림/고시키 츠토무] 세련님 커미션 작업물

양철인간 2016. 11. 21. 22:29


6666자





고시키 츠토무는 누군가 자신에게 가장 친한 여학생의 이름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같은 반 오오타 히카리의 이름을 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 만났으니 알고 지낸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고시키의 생각에 히카리는 자신과 꽤 친했다. 언젠가 같은 반 여자아이가 '고시키 군은 히카리 쨩이랑 정말 사이가 좋네…질투나.' 라고 말해서 히카리에게 소개해준 적도 있으므로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틀린 것이 있다면 그냥 고시키 츠토무의 눈치 자체다.


사실 그가 오오타 히카리와 친해지게 된 데에 드라마틱하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리를 정할 때 평균보다 키가 큰 두 사람이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 시작이었으니까.


'와, 앞머리는 자 대고 자른거야? 각 장난 아니네.'


당시의 발화의도야 어쨌건 고시키는 그것을 칭찬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히카리의 첫인상은 꽤 좋았다.


그 뒤로도 그녀는 종종 말을 걸어오곤 했다. 고시키는 썩 사교스킬이 뛰어나거나 말재주가 좋은 인종은 아니었는데도 히카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점도 호감에 한 몫을 더했다.


물론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고시키는 제법 단순하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일직선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친밀도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체육시간에 100미터 달리기 측정을 했던 날의 일이다.


고시키는 배구부의 차기 에이스(자칭)답게 반에서 제일 빠른 타임을 기록했다. 뿌듯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고시키 츠토무인 것이다. 미야기 최강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의 차기 에이스(자칭)인 것이다.


그런 생각에 티내지 않고 속으로 뿌듯해하던 고시키에게 히카리가 말을 걸어왔다.


"고시키, 너 엄청 빠르다."


감탄한 듯한 어조에 절로 콧대가 세워졌다. 언제 들어도 칭찬은 기분 좋은 것임에 틀림 없다. 괜히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배구부에서 차가운 선배들에게 치이기만 해서 칭찬에 목말라 있던 고시키에게 있어서는 더욱 좋은 것이었다.


"너는 몇 초인데?"

"나? 나는 별로 안 빨라."


여학생 평균 정도의 기록을 털어놓은 히카리는 다시 달리기가 빨라서 좋겠다며 고시키를 칭찬했다. 덕분에 고시키는 안 그래도 높았던 콧대를 더욱 드높이며 우쭐댔다.


"뭐 보통이지."

"좋겠다. 나도 달리기 빠르면 좋겠어. 쉬는 시간이 모자라서 매점을 못 간다니까. 점심시간엔 사람이 너무 많고."


히카리의 푸념에 고시키는 1학년 건물에서 꽤 떨어진 편인 매점의 위치를 떠올렸다. 확실히 히카리 정도의 달리기 속도로는 쉬는 시간 내에 다녀오기가 힘들 것 같기는 했다.


나라면 별로 어렵지 않지만!


고시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콧대를 세웠다. 잔뜩 기분이 좋아진 고시키와 히카리는 다른 사람들이 기록을 측정하는 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쉬는 시간 고시키는 여유 있게 매점에 다녀오는 김에 히카리가 먹고 싶다고 지나가듯이 언급했던 매점의 신상 빵을 샀다.


"자."

"어? 웬 빵이야? 앗, 신상이다."


자신이 건네는 빵을 받고 눈을 동그랗게 뜬 히카리를 보며 고시키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빨라서 매점도 금방 다녀오니까 빵 하나 정돈 더 사다 줄 수 있어."


이건 자기자랑인지 뭔지 모르겠다. 히카리는 고시키가 건네 준 빵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웃었다.


"고마워, 고시키."


활짝 웃는 히카리의 얼굴을 보자 조금 코끝이 가려워졌다. 고시키는 공연히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친해졌다. 여학생 중에 제일 친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고시키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매점에 들르면 히카리가 좋아하는 간식을 몇 개인가 사다주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나온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하기에 사다주었다. 그 광경을 지나가던 텐도에게 들킨 것은 우연이었다.


텐도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어째서인지 빵셔틀…아니 초콜릿셔틀을 하고 있는 후배를 빤히 보았다.


"여자친구?"


상식이라는 말만큼 텐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얼마 없지만, 어쨌건 나름대로 상식적인 수준의 의문이었다. 보통 키가 180cm가 넘는 허우대 멀쩡한 운동부 남자 고등학생이 간식셔틀을 해주는 건 구애 이외의 목적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시키는 텐도의 생각보다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 아, 아닙니다! 친구예요. 친구. 친구."


그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이 텐도의 짖궂은 흥미와 고약한 장난기를 함께 불러 일으켰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 같은 여자친구?"

"아니…"

"곧 여자친구가 될 친구?"

"아, 아니…!"

"1학년 주제에 벌써 여자친구나 사귀고 츠토무 건방져~ 대단한데 건방져~"

"감사합니…여자친구는 아니라니까요!"


시라토리자와 학원에는 짓궂게 놀림 당하는 1학년을 구해주는 선배 같은 전설의 생물은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전설의 존재인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귀를 가진 남학생은 잔뜩 있었다.


"츠토무 여자친구 있다고?"

"츠토무 여자라고?"

"츠토무 결혼한다고?"


고시키 츠토무에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은 몇몇 난청과 과장과 와전의 수라장을 넘어 배구부 전체에 퍼졌다. 소문이 어찌나 확실한 것처럼 퍼졌는지 장르가 공포 만화였다면 소문들이 뭉쳐서 고시키의 여자친구라는 이름의 요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배구만 하는 청춘 스포츠 만화라서 다행이었다.


고시키는 나름대로 열심히 해명을 했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달리기가 빨라서 가끔 간식을 사다준다는 말에도 부모님이 튼튼하게 낳아주신 몸으로 연애질이나 한다는 타박을 들었다. 


'그거 여자친구라기보단 그냥 빵셔틀 아닌가…?'


근처에 있던 시라부는 고시키의 필사적인 해명에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굳이 말할 정도로 상냥한 선배는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카토시 군, 우리 차기 에이스 군이 에이스를 뛰어넘어서 에이스보다 빠르게 연애를 한다는데 뭐 해줄 말 없어?"

"? 그런가. 연습에 지장이 없도록 건전한 이성교제를 하도록."


어째서인지 우시지마에게서는 할아버지가 해줄 것 같은 덕담을 들었다.


건전한 이성교제라니.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는 우시지마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 히카리가 자신의 여자친구라도 된 것 같다.


여자친구라니. 고시키에게 있어서는 이 이상 생소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츠토무, 얼굴이 빨간데~"

"예?!"

"여자친구의 어디가 좋았어?"

"좋, 좋다니요?"

"좋아하게 되면 생각만 해도 열이 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면서 그 사람이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고 귓가에서 종이 친다고들 하잖아. 뭐? 츠토무, 들어본 적 없어? 아직 어리구만! 여자친구는 어떻게 사귀었는지 모르겠네."

"여자친구가 아니라니까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해명해봤자 말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시키는 1학년 주제에 연애나 하고 다니는 건방진 후배가 되었다. 원래부터 건방진 후배라서 포지션에 큰 차이는 없었던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배구부원들이 오해를 하건 말건 고시키와 히카리는 평범한 학교 생활을 영위 중이었다. 사이 좋게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발견한 익명의 배구부원이 감독에게 투서를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든가 하는 것은 모르는 게 약인 이야기다.


이번 주는 히카리와 고시키가 함께 당번을 맡은 주였다. 고시키는 히카리의 '너 키 더 큰 거 아니야?' 하는 말에 의욕을 불태워 혼자서 칠판을 깨끗하게 닦았다.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번 일을 마친 히카리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시키를 칭찬했다.


"깨끗하게 잘 닦았다. 고시키, 넌 칠판 닦기 천재야. 괜히 1학년인데 배구부 주전인 게 아니네."


히카리의 칭찬에 고시키는 더욱 뿌듯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배구부 에이스로도 모자라서 칠판 닦기 에이스라니 자신의 재능이 무섭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배구와 칠판닦기의 관계성은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답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자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배구부는 또 무슨 대회 있다며?"

"응. 좀 있으면 봄고 예선이야. 응원 올 거냐?"


고시키가 약간의 기대를 담아 물었다. 인터하이 때는 이렇게까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원하러 오라는 말은 하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꼭 응원하러 와줬으면 좋겠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정확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응원하러 와줬으면 했다. 선배들도…오해이긴 하지만 여자친구를 초대하는 게 기본이라는 말을 했었으니 좋은 핑계다. 여자친구라는 말을 떠올리니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고시키는 차마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글쎄. 갈까?"

"너 인터하이 때도 안 왔었지. 시라토리자와 학생 맞냐?"

"나 결승은 보러 갔었는데. 단체로."

"어, 진짜?"


그건 몰랐다. 하긴 결승 쯤 되면 응원단도 단체 관중도 바글바글하니까 아는 얼굴을 찾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몰랐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입맛이 썼다.


"응. 배구는 잘 몰라서 힘들었지만…그 우시지마라는 선배 멋있더라. 엄청 세고."


마지막으로 칠판 지우개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히카리가 가볍게 배구부 제일의 유명인사를 언급했다.


"!"


히카리의 입에서 나온 '우시지마'라는 이름에 고시키는 움찔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시라토리자와 학생이라면 모를 리 없는 유명인사다. 배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눈앞에서 우시지마의 활약을 본다면 정말 굉장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고시키라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


뭐라고 해야 할까. 처음 우시지마에게 '이번에야 말로 꼭 이기겠습니다!'하고 외친 후 '? 그래, 힘내라.'하는 대답을 들었을 때만큼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어쩌면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울렁거림인 것도 같았지만 고시키의 국어실력으로는 이 감정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시키?"


말이 없어진 고시키가 의아했는지 히카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시키는 히카리가 걱정스러운 듯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알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갑자기 왜 그래?"

"오오타."

"응?"


고시키 츠토무는 평소에도 많은 계산을 하고 움직이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 나를 응원해."


고시키는 눈을 동그랗게 뜬 히카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나는 말을 마구잡이로 뱉었다.


"우시지마 선배 말고, 나! 내가 우시지마 선배도 뛰어넘고 에이스 할 거고 내가 더 멋있고, 그리고…나도 스트레이트 잘 치고 또…멋있을 거고 그리고…."

"일단 알았으니까 진정해."

"으…."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휘력이 모자란 탓이었다. 입만 뻐끔거리던 고시키는 히카리가 자신의 손을 살짝 붙잡는 바람에 급하게 숨을 들이삼켰다. 손가락이 불에 덴 것 같이 뜨거웠다.


"아무튼 응원하러 오라는 거지?"

"…어…."


말이 그렇게 되나. 맞는 말인 것 같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는 고시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멋있는 거 기대할 테니까 활약해야 된다."


히카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못하면 응원이고 뭐고 쥐뿔도 없어."


응원의 의미인지, 히카리의 손이 가볍게 고시키의 손등을 두드리고 떨어졌다.


고시키는 그 순간 자신의 심장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심장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너무 크게 뛰어서 착각했던 것이었다.


"……."


뭐였지.


고시키는 우시지마를 따라잡겠다며 한참 오버워크를 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께에 손을 얹었다.


"고시키? 또 왜 그래?"


히카리는 다시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고시키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가슴 근처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어디 아파? 열 있나?"

"!"


히카리의 손이 가지런한 앞머리로 가려진 고시키의 이마에 가까워졌다. 부드러운 손이 이마에 닿는 바람에 고시키는 서 있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손이 떨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헉, 너 얼굴 엄청 빨개. 보건실 가자."


고시키의 얼굴을 확인한 히카리가 고시키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그때까지도 예상치 못한 호흡곤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고시키는 그 손에 반쯤 끌려가며 멍하니 텐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좋아하게 되면 생각만 해도 열이 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면서 그 사람이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고 귓가에서 종이 친다고들 하잖아. 뭐? 츠토무, 들어본 적 없어? 아직 어리구만!'


텐도의 말에 의거해볼 때, 고시키 츠토무는 오오타 히카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열이 나고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오오타 히카리가 일곱가지 색으로 빛나거나 귓가에서 종이 치지는 않으니까.


분명히 좋아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무언가 다른 의미의…그렇지, 봄고 예선 전에 컨디션 조절을 잘하라는 몸의 충고인가! 아직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늠름한 오오타 히카리의 손에 붙잡혀 보건실로 반쯤 질질 끌려가면서 고시키는 자신의 컨디션 관리를 새삼 반성했다.


'수면 시간을 조정해야 하나….'


진지하게 수면 시간이나 식단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도 컨디션 조절 같은 이야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장의 고동이나 마음의 술렁거림에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배구부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눈새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아직 꽤 많은 시일이 소요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