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하이큐

[하이큐/드림/카게야마 토비오] 조금 이른 후회

양철인간 2015. 3. 22. 23:27

*전력 드림 60분

*주제: 후회

*하이큐 카게야마 토비오 드림

*정신 없음 주의 노잼 주의




조금 이른 후회




인생은 선택과 후회를 연속하는 과정이다. 말 그대로 세상에 후회하지 않고 사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최근의 나는 제법 심각한 후회를 하고 있었다.


무슨 후회인가 하면


눈이 나쁜 친구의 부탁을 받아들여 자리를 바꿔준 것에 대한 후회가 첫번째.


"……쿠울…."

"거기 카게야마 좀 깨워라!"


덕분에 매일매일 수업시간마다 숙면을 취하는 옆자리 남자애의 기상 셔틀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가 두번째.


"쿨쿨 잘 자고 있는 카게야마 옆자리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그리고 왠지 우리 반 랜드마크가 된 것 같은 <수업시간마다 잠자는 카게야마 토비오, 2015> 옆에서 늘 칠판 문제풀이의 희생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내 신세에 대한 후회가 세번째다.


요는 옆자리가 카게야마인 게 나쁘다는 얘기지. 역시 자리 같은 건 바꿔주지 말걸 그랬다는 근본적인 부분도 걸리긴 하지만, 모든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역시 카게야마인 게 나쁘다.


왜냐하면 수업 시간마다 문제풀이를 대체 왜 자고 있는 애한테 안 시키고 나를 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성토하자면 사흘 밤낮을 샐 수도 있겠으나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게야마 토비오는 멍청이였다.

그것도 완전한 똥멍청이.


새학기가 시작하고 처음 카게야마의 옆자리에 앉아 수업시간마다 꿈나라 여행을 떠나던 카게야마에게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던 때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카게야마. 어디 아파? 피곤해? 아니면 그냥 식곤증?"


배구부라고 들었는데, 배구부에선 벌써부터 신입생을 혹독하게 굴리는 걸까. 그런 걱정을 하며 졸린 눈을 깜빡이던 카게야마를 들여다보았다.


카게야마가 눈을 비비면서 한 대답은 이랬다.


"식곤증…이 뭔데?"

"…?"


카게야마는귀국자녀였던가?


"drowsiness…after meal?"


영어 사전을 찾아 알아낸 영단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 일본 사람이 왜 영어를 쓰냐??"


당연히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카게야마는 애초에 귀국자녀도 아니었고, 심지어 영어점수는 내 반절도 되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카게야마, 근의 공식은?"

"근???"


이 자식, 고교 입시는 어떻게 통과한 거지?


카라스노의 입학 과정에 부정부패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카게야마한테 그 정도 주변머리가 있을 리도 없지만.


그렇게 보게야마와 함께 하는 몇 달이 지나, 내 오지랖이 죄였는지 옆자리에 앉게 된 게 죄였는지나는 카게야마에게 단어의 뜻을 설명해주거나 간단한 수학 공식을 알려주거나 잠든 카게야마의 옆구리를 찔러 깨우는 일 모두에 익숙해졌다.


카게야마는 공부에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냥 잠자는 학교의 멍청이였다.


완전 빠가사리. 대왕빠가사리. 우리집 해피(푸들, 4세)에게 10년 동안 국영수를 가르치면 카게야마와 비슷한 점수가 나올 것이다.


한심하지 않은 남자는 귀엽지 않다고 하지만, 이건 한심한 수준도 아니야. 카게야마의 쪽지시험 점수는 핵노답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바로 직전에 알려준 것도 틀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니? 나한테 교사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시위하는 거니?


"카게야마, 일어나."


그렇게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채운 것을 후회하며 몇 달을 보내고, 이제는 카게야마를 깨우는 것도 거의 기계적인 일상이 되었다…고 생각한 학기 막바지의 어느 날.


"저기, 노트 좀 빌려주라."


카게야마가 천지개벽할 소리를 했다.


"??????? 나 꿈꾸나?"

"? 아니. 깨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쥐가 깎은 손톱을 먹고 사람으로 둔갑했다는 그 설화의 리얼 버전일까? 아니면 괴담 중에 도플갱어 이야기? 지금 진짜 카게야마가 교실로 들어오면 한 명이 죽는 건가? 아니면 코난을 쫓는 검은 조직의 누군가가 미야기까지 흘러들어와 카게야마로 변장하고 음성변조기를 쓰고 있는 상황?


"어이."

"아니 그게 아니면…."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던데….


"카게야마, 죽지 마!!!!"


통곡할 뻔했습니다.


다행히 카게야마가 아직 쌩쌩하고, 사람이고, 도플갱어도 아니고, 음성 변조기도 쓰고 있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진정할 수 있었던 건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헤에. 여름합숙 말이지."

"꼭 가야 돼."


아무래도 배구보다 일본어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듯한 카게야마의 설명이 너무나 존못이었기 때문이다. 현대국어 100점에 빛나는 나의 청해력으로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카게야마는 이 커뮤력으로 대체 어떻게 팀 스포츠를 하고 있는 거지…하긴 저번에 지나가다 보니까 주황머리의 작은 애한테 보게! 보게! 하고 계속 똑같은 말만 하고 있더라. 고장난 줄 알았다. 배구부 여러분 보게야마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침에 절은 휴먼졸림체 노트에 내 필기를 옮겨적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한 번, 창문 너머 체육관 방향으로 한 번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서 낙제 면하고 합숙 갈 수 있겠어?"


카게야마의 평소 쪽지시험 점수를 생각하면 암담한데.


"해야지."


그러나 의지를 가득 담아 대답하는 카게야마의 얼굴은 결연했다. 어떻게든 이뤄내고 말겠다는 뜻을 가득 담고 있다. 몇 달 동안 이렇게 진지한 얼굴은 밥 먹을 때 말고 처음 봤다.


"너도 참. 배구가 그렇게 좋아?"


노트를 돌려받으면서 가볍게 툭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당연하지."


카게야마도 가볍게 대답했을 뿐인데.


"…."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어서.


"…어라…."


잠깐 심장이 쿵 했던 듯한 기분이.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카게야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심박수가 올라간 느낌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 어. 연습 열심히 하고…낙제하지 말고."

"응."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챙겨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기 시작한 심장 부근을 살짝 눌러보았다.


"…으음."


어쩌면 미래의 어느 날인가에.

오늘 배구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카게야마를 보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지도 모르겠다.